[양금석] 우수가 묻어나는 우리시대의 악녀

기사입력 1997년 02월 11일 17시 55분


그날따라 신이 떠나버린 도시-서울엔 눈발이 잊혀진 과거 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2월 어느날 오후 3시 정각.배우 양금석(梁金錫 36)은 서울 태평로의 한 찻집에 나타났다. 세련된 매너엔, 그러나 지나퍼린 파시(波市)의 우수가 묻어났다.창밖엔 어느덧 눈발은 멎고 '차갑고 화사한 겨울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양금석은 무표정했다. 백치같기도 하다가 순간순간 도도했다. 그리고 차가왔다.아카루스처럼 초로 만 든 날개를 달고 다니는 여자같기도 했다."인터뷰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해봐야, 만날 그 얘기가 그 얘기고, 그것보다 내가 출연하고 있는 연극 홍보나 할 속셈으로..."그러면서도 양금석은 소리없이 웃었다. 계면쩍어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웃음이 얼핏 해맑다고 느껴졌다 사라졌다.민중극단과 극단 맥토의 연극'이상적 남편'(An Idael Husband 오스카 와일드 원작). 양금석은 재미교포 로비스트 애니 킴벌리로 나온다."풍속희극이다. 영국 상류계층의 풍속도를 위트와 재기로 플어낸 것인데... 이번 무대는 정진수씨가 번안, 연출했다. 우리사회에 마연된 정-재계의 부패 비리 스캔들 등을 등장시켰다."양금숙. 요즘 몸살이 나도록 뛰고 있다.'유혹' '성장느낌 18세' '산' 등 세편의 TV드라마에 출연중. 2TV의 '유혹'. 불륜시비에 휘말리면서 주부들에게 항의깨나 받는다."윤혜선 역을 맡았다. 정략결혼이란 당초부터가 이미 불행을 예고한게 아닌가. 애정없는 부부는 이미 부부가 아니다. 남편에게 실망하고 연하의 남자와 사랑하다 끝내 자살하는 것으로 당초 되있었는데...남편과 재결합하는 걸로 선회할 것 같다."양금석. 키 1m65. 54kg. 눈빛은 강열하다. 소 퇴폐적이다. 여기다 냉정하고 이지적이다.이로 인해 그는 '강한 여자'역을 도맡아 한다.SBS TV의 드라마' 결혼'에서 자기주장이 강한 패션디자이너-이명희 역으로 떴다. 유부남을 가로채는 이혼녀역을 몸서리치게 연기해냈던 탓이다.드라마 '미늘'에선 회사장의 부인역. 여기서도 불륜에 휩싸여 고민한다.뮤지컬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도 자존심 강하고 이기적인 블랑시역을 맡았다."'틀'이 던지는 부작용은 심각하다. '틀'이 아니라 '편견'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선지 본의아니게 '악녀'로만 등장한다. 정작 하고 싶은 역은 못하고 있다."'성장느낌 18세'에선 편안한 엄마역을 맡았지만 이도 성에차는 것은 아니다."김유정의 '금따는 콩밭'이나 김동인의 '감자' 같은 작품에 출연하고 싶다."양금석. 언젠가 SBS TV 드라마 '분례기'를 잊지 못한다.토속적인 무대. 그 광녀(狂女)-명화역은 지금도 선연한 감동으로 남아있다.양금석. 충남 아산 태생. 서울에서 성장. 한남 초등학교-신광여중-고 졸.고교때. 전국 학생극경연대회에서 '백마강은 흐르는가'의 성충역으로 연기상을 받아냈다.81년. 갓 스물. 극단 현대극장에 입단. 뮤지컬 '에비타'에서 무용수로 데뷔한다. 이때 차분한 몸짓과 정감은 있으나 저돌적인 저음으로 튄다.83년. '까치교의 우화'에서 주인공 달래역을 따낸다.그 이듬해. 현대극장에 입단. 뮤지컬 '지저스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 막달라마리아역을 맡으면서 '괜찮은 배우'로 인정받는다.이후 민중극단의 '서푼짜리 오페라', 대중의 '넌센스' 등으로 연극판에 '배우 양금석'을 각인시킨다.그러나 가장 못잊어하는 작품은 연극 '칠갑리'. 민중극단의 서울연극제 참가작품. 신인연기상을 받는다."빨치산 얘기다. 산에 버려진 아기를 주워다 기르는 어미역이였다."이밖에 '뜨거운 양철지붕위의 고양이' '느릅나무 그늘의 욕망' 등에 출연, 주가를 높인다.영화 '한줌의 시간속으로' '네온속으로 노을지다' 에도 출연한다.양금석. 이따금씩 영화를 본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델마와 루이스' '샤인' 등은 너무 좋았다.배우 로버트 드니로나 알파치노를 보면 '배우의 길'이 보인다.양금석. 말수가 적다. 눌변이다. 비사교적이다. 일이 끝나면 곧장 집으로 간다.늘상 우수에 차있다. 그렇다고 그 우수의 정체가 또렷한 것도 아니다. 공연이 끝나면 방황한다. 무대가 없다는 건 견딜 수 없다. 텅빈 객석은 허황하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의 허수아비다.'나는 어디서, 어디로 왔단 말인가. 어디서 ,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러나 아무데도 갈은 보이지 않는다.'마음 둘데 없어 뒤척이는 날. 해질녘이면 홀로 강가에 간다. 그것도 얄궂은 봄날에 얼음을 깨뜨리며 흐르는 강물은 아, 얼마나 가슴 저미는 황홀함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