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스타일기] 정흥채(11)
기사입력 1997년 01월 12일 15시 05분
극단 전원에 입단한 지 3개월만에 처음으로 연극 무대에 서게 됐다. 마침내 배우로 공식 데뷔한 것이다. `끝없는 아리아'라는 작품으로 내가 맡은 역은 `연출자'. 단역이었지만 처음이라 무대에 서면 가슴이 뛰었고, 끝나고 나면 뭘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이렇게 내 연극 인생은 시작됐다. 하지만 배우가 됐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화려한 스타도 아닌, 그저 연기가 좋아서 하는 무명 배우인데다 연극 배우라는게 원래 배고픈 직업이라 돈없는 설움은 여전했다. 경제 사정이 어렵다보니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포장마차, 공사장 막일꾼, 카페 웨이터 등등. 손에 걸리는 대로 별의별 일을 다했다. 당시 나는 공연이 끝나면 혜화동에서 흑석동 집까지 걸어가곤 했다. 시원한 밤공기를 마시며 혼자 걸으면서 상념에도 잠기고 노래도 불렀다. 특히 한강대교를 건널 때는 우렁찬 소리로 불렀는데 심야 데이트 족들이 깜짝 놀라 나를 비켜서 갈 때는 웃음이 나왔다. 이럭저럭 무대에 선지 2년이 지난 89년 여름. 어느날 연극 선배 한분이 나를 찾더니 느닷없이 "장길산 한번 해볼 생각 없느냐"고 묻는 것이 아닌가.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당시 에서 특집 기획으로 황석영 원작의 대하소설 `장길산'을 드라마로 만들 계획인데 신인 주인공을 찾는다는 거였다. 그래서 아는 사람을 통해 나를 강력하게 추천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시켜만 준다면 마다할 리 없는 상황. 거기다 주위에서 "그 덩치에 그 인물에 장길산을 맡을 사람은 대한민국에 너말고 없다"며 바람을 집어 넣어 은근히 표정 관리까지 해야 했다. `장길산이라….' 가만히 생각해 보니 신체조건, 연기경력 등 내 조건이 과히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