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스타일기] 정흥채 (9)
기사입력 1997년 01월 10일 15시 40분
"연기하면 굶어 죽기 딱 좋다"는 집안 어른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나는 연영과를 포기하고 지방에 있는 모대학 국문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마음이 콩밭에 가 있으니 공부가 제대로 될 리 만무. 강의실에 앉아도 머릿속은 온통 딴 생각으로 가득하고 결국 볼펜만 빙빙 돌리다 몇 달 안가 학교를 그만 뒀다. 학교를 포기하니 앓던 이를 뺀 것처럼 기분은 일단 시원했지만 앞날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방구석에 틀어박혀 벽을 바라보며 `이제 뭐하나' 하는 상념에 잠겨 며칠을 보내다 `에라 모르겠다. 연기를 하겠다고 마음먹었으니 일단 부딪쳐 보자'는 `깡다구' 하나로 서울로 올라왔다. 그때가 84년 여름. 내가 찾아간 곳은 바로 충무로였다. 연영과 입학은 일단 좌절됐지만 실전을 통해 몸으로 배우자는 요량으로 나는 영화판을 택했던 것이다. 당시 나는 아는 사람의 소개로 영화촬영장을 쫓아다니며 잡일을 도우며 영화촬영을 구경했다. `봐 두면 다 이게 공부다'는 생각으로. 짐 나르고 장비 설치하고…. 이런 일을 몇달 하며 촬영장을 왔다갔다 하니까 내 덩치를 보고 몇몇 분들이 엑스트라라도 해보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나로서는 처음 받는 캐스팅제의였지만 거절했다. 전혀 기본기도 안된 마당에 연기를 시작한다는 게 왠지 싫었던 것이다. 고정된 일자리도 없이 타향을 떠도는 신세라 나는 당시 하루에 거의 밥 한끼 밖에 먹지 못했다. 돈없는 설움이 시작된 것이다. 형이 조금씩 대주고 틈틈이 속칭 `노가다'같은 일을 하면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 지났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정말 견디기 힘든 암울한 시기였다. 꿈은 창창했지만 도저히 길은 안보이니 젊은 놈이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한때는 `차라리 죽어버릴까'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