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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로드롬의 총알 탄 사나이'로 불린다. 전매특허는 '송곳 추입'이다. 막판, 눈깜짝하는 사이 치고 나간다. 그렇게 500번을,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다.
지난 4일, 그 큰 일을 해냈다.'경륜의 새 역사'다. 바로 홍석한이다.
어릴 때 주사를 잘 못 맞았다
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았다. 감각을 찾기 위해 운동을 했다. 육상을 택했다.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좋아지기 시작했다.
합덕 중학교, 운명의 그 곳이다. 학교에 싸이클부가 있었다. 선생님이 권했다. 집에서는 반대를 했다. 장남이라, 운동보다는 공부를 했으면 했다.
그런데 운동이 좋았다. 공부보다는 더 잘할 것 같았다. 페달을 그렇게 밟았다. 운명의 시작이다.
중학교 2학년 때다. 조회시간이었다. 싸이클부 선수들이 전국대회에 출전, 상을 받아왔다. 혼자만 대회에 못나갔다. 창피했다. '다음에는 나만 받아야지.'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다음해, 정말 그렇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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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렇게 한 뒤, 그의 시대를 만들어나갔다. 합덕농고-중앙대를 거쳐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 나갔다. 4km단체추발에서 금메달을 땄다. 1km 독주에서는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 4km 단체추발 2연패를 했다. 17,18회 아시아 싸이클선수권대회에서도 2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1km독주에서다.
2001년, 경륜무대에 발을 내디뎠다. 7월21일 광명 3경주에서 첫 승을 올렸다. 그 해 거둔 승수가 19승이다. 이듬해 그랑프리대회 챔피언에 올랐다. 각종 대상 경주를 휩쓸었다. 무려 45승을 챙겼다.
그렇게 경륜에서도 그의 시대가 열렸다. 매년 40승 이상을 올렸다. 2007년에는 50승까지 찍었다. 그를 두고 주위에서는 "순간 스퍼트와 막판 결정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평가했다.
존재감 없는 상실감
강력한 라이벌이 등장했다. 대표팀 선배 조호성(11기)이 경륜장에 나타났다. 2인자로 밀렸다. 2010년, 우승횟수가 10승으로 곤두박질쳤다. 조호성의 뒤를 이어 노태경 이욱동이 등장했다. 세대교체를 외쳤다. 그 '젊은 피'에 밀렸다. 2011년에도 20승을 넘기지 못했다. 17승에 그쳤다.
"홍석한의 시대는 갔다"는 말이 나왔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불면증까지 찾아왔다. 후에 홍석한은 "존재감이 없는 선수로 인식되는 게 견디기 힘들었다. 뒤에 따라가고 있어도 선수들이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고는 싸이클를 그만 두고싶다는 생각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렇게 그의 싸이클도 끝나는 줄 알았다.
가장 잘하는 것을, 가장 잘 선택했다
2012년, 29승을 올렸다.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며 이를 악문 결과다.
지독하게 훈련을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훈련스케줄은 꼭 끝냈다. "훈련에 있어서는 절대 나와 타협하지 않는다"는 그의 신조대로다. 2013년에는 31승을 챙겼다.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500승을 바라보며 새 의욕도 생겼다. 확실한 동기부여가 됐다. 홍석한은 "덕분에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며 웃었다. 그렇다. 이제는 웃을 수 있다.
그에게 물었다. 본인의 선택에 후회는 없는지. 먼저 "아버지처럼 회사다니면서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하지만 가장 잘 한 것 같다.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을 가장 잘 선택한 것 같다"고 했다.
신보순기자 bsshin@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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