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애가 많이 아파서 입원을 했는데 불명열에 시달리면서까지 일주일을 버티는 동안 도무지 차도가 없었다. 병실이 꽤나 추웠던지라 매일 밤을 새며 간호를 했던 필자는 끔찍한 감기에 걸려 어쩔 줄 모르다가 같은 병원 응급실에 가서 진료를 받기로 했다.
"그럼요, 그게 규정인 걸요."
"나중에 어떤 의사가 되실지 모르겠지만, 어디서 명령조예요? 의사라면 환자의 아픈 사정을 일단 들어주고 그에 맞게 처방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일 똑바로 하세요!"
그리고 몇 년이 흘렀다. 어느 날인가 신장에 염증이 생긴 것 같다며 동네 병원에서 소견서를 써주었다. 다음날 입원을 했고 병실이 정해졌는데, 주치의(대부분 전공의 1년차)가 뚜벅뚜벅 내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아뿔싸! 이게 누구더냐! 그때 머리채만 안 잡았지, 죽을똥 살똥 눈을 부릅뜨고 막장까지 갔던 그 여의사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있는 것이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옛말 그른 거 하나 없더라는 게 정말 맞는 것 같다.
혹시나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침상에서 밖으로 나갈 때 조차 눈치를 보곤 했는데 의외로 사근사근한 것이다. 나이가 있어보였던 것은 졸업 후 직장을 다니다가 다시 의대를 지원하느라 그리 되었다는데 그래서인지 동료들이나 선배들과 어울리는 것을 힘들어하는 티가 역력했다. 그래도 나름 친절하게 대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어찌나 어색한지 나는 나대로, 그녀는 그녀대로 죽을 맛이었다. 여기서 반전은 CT 촬영 결과에 기존에 수술한 질병이 재발했다는 거의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그 진단결과를 전하는 그녀의 태도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럴지도 모른다는 예측에 불과하니까, 수술한 병원이나 저희 병원 OO과를 가보세요. 혹시 모르잖아요. 아닐지도…" 시크하면서도 늘 도도했던 그녀의 말 한마디에 와락 껴안아주고 싶은 고마움이 묻어나왔다.
퇴원하면서도 진단서를 타이핑하는 고단한 그녀의 뒷모습에 왠지 모를 짠함이 느껴졌고 밤새 잠 설치고 일하는 새내기 레지던트의 바짝 군기 잡힌 스타일에 어깨를 주물러주고 싶었으니…. 참으로 사람의 인연이란 묘하다는 것이다.
오늘의 적군이 내일의 아군이 될는지는 모르겠으나 살다보면 참으로 예기치 못한 인연이란 존재하는 것 같다. 지금쯤 어엿한 레지던트 4년차로 군림하고 있을 그녀를 웃으며 상상해본다.
"선생님…. 정말 좋은 의사가 될 겁니다. 화이팅!!"
SC페이퍼진 주부명예기자1기 고정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