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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 in 골프]회복탄력성의 가치를 보여준 전미정의 품격

정현석 기자

기사입력 2019-01-21 07:00



삶에 있어서 회복탄력성(resilience)은 중요한 개념이다.

역경과 시련으로 마음이 다쳤을 때 실패를 도약의 발판으로 다시 도약하는 마음의 근력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인간의 의지로 도저히 컨트롤 할 수 없는 불행한 일들이 찾아올 때가 있다. 이 때가 바로 인생의 시험 기간이다. 삶의 갈림길은 불행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서 갈린다. '나에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라는 마음으로 극복하려는 사람과,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날까'하는 마음으로 자포자기 하는 사람이 만들어낼 결과 차이는 하늘과 땅이다.

그런 면에서 골프도 인생을 참 많이 닮았다. 삶에서나 골프에서나 '실수'와 '실패'는 본질적이다. 피할 수 없다. 많이 힘들지만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게 인생이고 그게 골프다.

현재적 삶을 통해 과거를 극복하고 다시 앞으로 나가야 한다. 실수나 실패를 부정하고 두려워 하면 할 수록 그 덫 안에 갇히고 만다. 과거의 회한과 미래의 공포에 빠져 한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이미 저지른 과거의 실패를 곱씹어 후회하고,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실패가 두려워 전전긍긍한다. 그러다 보면 정작 집중해야 할 현재가 슬그머니 사라진다. 끊임 없이 과거와 미래에 담보를 잡혀 살게 된다. 어느 한 순간도 온전한 나의 소중한 '현재'는 없다.

골프도 마찬가지다. 과거와 미래의 실수와 실패가 두려워 피니시도 제대로 잡지 못하는 선수가 수두룩 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정말 상상조차 하기 싫은 '입스'가 찾아온다.

천하의 타이거 우즈도 끊임 없이 실수를 한다. 하지만 그는 남들과 달리 자신이 일으킨 실수와 실패가 몰고오는 거센 바람을 뚫고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내딛은 발걸음이 위대한 골프의 역사가 됐다. 비결은 지금 이 순간, 현재 샷에의 집중이다. 굿샷에 격하게 환호하고, 미스샷에 격하게 클럽을 집어던지는 이유는 잊기 위해서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다음 플레이에 미칠 영향을 막으려는 루틴 같은 행동이다.


'위대한 골퍼' 타이거 우즈는 성공과 실패의 감정을 즉석에서 바로 소비한다. 성공에 격하게 환호하고, 실패에 채를 집어던지며 분노한다. 이 상반된 행동은 희비의 감정을 다음 플레이와 철저히 격리하기 위한 그만의 접근법이다. AP연합
전미정(37)이 까마득한 후배들에게 베테랑의 품격을 제대로 보여줬다. 일본 투어에서 활약중인 전미정은 20일 대만에서 막을 내린 KLPGA 투어 대만여자오픈(총상금 80만 달러, 우승상금 16만 달러)에서 우승했다. 미식 여행을 겸해 실전 테스트 차 1년3개월 여만에 참가한 대회가 무려 16년 만의 KLPGA 투어 3승째를 안겼다.


스토리가 있는 짜릿한 드라마 같은 순간이었다. 사실 이번 대회 우승은 전미정에게 "믿어지지 않는" 결과였다. 대회가 열린 가오슝 신이골프클럽은 페어웨이가 넓고 전장이 긴(본선 6548야드) 골프장. 청야니나 김아림(24) 같은 장타자에게 유리한 전형적인 코스다.

하지만 전미정에게는 이들 장타자들에게 없는 게 하나 있었다. 바로 회복탄력성이었다.

12언더파로 김아림과 공동선두를 달리던 전미정은 전반 막판 큰 위기를 맞았다. 8번 홀 세컨샷 미스로 더블보기를 기록한 뒤 9번 홀에도 보기를 범해 순식간에 3타를 잃었다. 우승이 멀어지는 암담한 상황. 하지만 그 순간 전미정은 컵에 담긴 절반의 물을 보고 '아직 반이나 남았네'라는 생각을 했다. 놀라운 회복탄력성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아직 9개 홀이나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설령 우승을 못하더라도 즐겁고, 자신감 있게 치자는 마음가짐으로 후반에 임했더니 좋은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전미정은 후반 11,12번 홀에서 잇달아 버디를 잡아내며 11언더파로 다시 공동선두로 올라섰다.


마지막 18번 홀(파 5) 챔피언 퍼팅은 관록의 끝을 보여준 장면이었다. 상황은 최악이었다. 앞 조의 김민선이 막판 연속 버디로 공동선두로 뛰어올랐다. 같은 조 짜이페이잉(대만)은 4m 버디퍼팅을 성공시키며 전미정과 동타를 이뤘다. 대만 현지 팬들의 환호가 터졌고 짜이페이잉은 양 손을 들어 화답했다. 그 분위기 자체가 버디퍼팅을 앞둔 전미정에게는 커다란 심리적 압박 요인이었다. 눈 앞에 펼쳐진 3.5m 버디퍼팅. 들어가면 우승, 안들어가면 연장승부였다. 절체절명의 순간, 전미정은 철저하게 '현재'에 집중했다. 관록의 베테랑은 차분히 공을 홀 컵에 떨어뜨렸다. 마치 결과를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격하게 환호하지 않았다. 살짝 주먹만 쥐었을 뿐이다.


챔피언 퍼트를 성공시킨 뒤 담담하게 주먹을 쥐고 있는 전미정.
"반드시 들어갈 거라고 생각했어요. 못 넣으면 연장을 가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요. 그래서 더욱 내 퍼트에 집중하고자 했죠. 할 수 있는 걸 다 해놓고 결과는 나중에 생각하자는 마음으로 퍼트를 했더니 버디로 이어졌습니다."

퍼팅에 실패해 우승을 놓쳤던 과거를 생각했거나, 연장 승부를 갈 수도 있겠구나 하는 부정적 미래를 상상했다면 아마도 전미정의 챔피언 퍼팅은 실패로 돌아갔을 것이다. 드라이버도 길지 않고, 남들처럼 실수도 했던 전미정.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릴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회복탄력성에 있었다.


정현석 기자 hschung@sportschosun.com

대만여자오픈 대회 사진제공=KLPGA/박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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