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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5일, FA컵 대진추첨에서 FC서울을 4강 상대로 맞이하게 된 박항서 상주 감독은 최용수 서울 감독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최용수 감독에게 미리 말하겠다. 승부차기까지 생각해라."
박 감독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상주의 전력이 서울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승부차기까지 간다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박 감독은 머릿속에 한 사람을 그렸다. 골키퍼 홍정남(26)이었다. 2007년 프로에 데뷔해 8시즌 동안 리그 13경기에 뛴 게 전부인 '신인급' 선수에게 박 감독은 FA컵 4강전의 운명을 맡겼다. 그의 올시즌 리그 출전 횟수는 단 3회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홍정남은 현재 상주의 주전 골키퍼다. 과연 홍정남은 누구일까. 그의 축구 인생은 '11m 러시안 룰렛'으로 불리는 승부차기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홍정남은 팬들에게는 무명이지만 축구계에서는 잘 알려져 있다. 국가대표 수비수 홍정호(25·아우크스부르크)의 한 살 터울 형이다. 초등학교 5학년때 축구부에 입단한 홍정남은 초·중·고에서 동생과 함께 프로 선수의 꿈을 키웠다. 형은 골키퍼로, 동생은 공격수로 활약했다. 제주에서 축구 유망주 형제로 이름을 알렸다. 동생과의 축구 추억이 수두룩하다. 그 중 홍정남이 기억하는 최고의 장면은 함께 뛴 마지막 경기였다. 2006년, 고등학생 3학년이던 홍정남과 2학년이던 홍정호는 제주교육감기 결승전에 나란히 출전했다. 우승컵의 주인은 마지막 승부차기에서 갈리게 됐다. 그 때 홍정호가 제주중앙고의 첫 번째 키커로 나섰는데 실축을 하고 말았다.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숙이고 뒤돌아서는 동생을 지켜본 형은 이를 악물었다. "내가 만회하는 수밖에 없겠다." 결국 홍정남은 킥을 두 차례나 막아내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동생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홍정남은 "우승을 했는데도 정호가 계속 고개 숙이고 울면서 천천히 걸어오더라. 그 때 내가 안아줬다. 그게 정호와 함께 뛴 마지막 경기다"라며 기억을 떠 올렸다. 형제는 나란히 프로에 진출했고, 서로 고민을 털어놓으며 뜨거운 형제애를 나누고 있다. 홍정남은 "원래 힘든 일이 있으면 끙끙 앓는 스타일이었는데 힘들때 가족한데 연락을 하니 의지가 되었다. 그 이후로 자주 연락을 하며 고민을 털어 놓는다. 요즘 군인이라 자주 전화는 못하지만 독일에 있는 정호가 나를 많이 응원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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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남은 '8년째 신인'이다. 전북에서는 6시즌 동안 8경기에 출전하는데 그쳤다. 힘든 시간의 연속이었지만 그의 사전에 '포기'란 단어는 없었다. "경기는 못뛰고 나이는 들고…. 많이 힘들었지만 가족들이 '기회가 오니깐 참고 기다리라'는 말을 많이 해줬다. 그만둔다는 생각은 한 번도 안하고 더 잘해야 겠다는 생각에 하루에 네 번씩 운동을 하며 오기로 버텼다." 상무에 입대한 이후에도 그의 입지는 여전히 좁았다. 첫 시즌에 2경기 출전에 그쳤다. 올시즌 반전의 무대가 열렸다. 1.5군이 출전한 수원과의 FA컵 32강전 승부차기에서 홍정남은 눈부신 선방으로 '거함' 수원을 꺾는데 앞장섰다. 상승세가 이어졌다. 8강에서는 강원을 상대했다. 또 다시 승부차기에 4강행 티켓의 운명이 결정됐다. 홍정남은 강원의 킥을 세 차례나 막아내며 군팀 최초 FA컵 4강 진출의 일등공신이 됐다. 승부차기 선방 덕분에 홍정남은 8월 말부터 프로 8시즌만에 처음으로 '주전' 타이틀을 달게 됐다. 그에게 주전의 달콤함을 선사해 준 승부차기를 잘 막는 비결은 무엇일까. 홍정남에게서 돌아온 답은 간단했다. "이겨야 된다는 생각, 무조건 이긴다는 의지였다. 그동안 기회를 많이 놓쳤는데 이번에는 놓치기 싫었다."
홍정남의 꿈은 소박하다. 동생과 함께 국가대표를 꿈꾸던 시절도 있었지만 현재 그의 목표는 '경기 출전'이다. 막 시작되고 있는 주전 인생에서 행복을 느끼고 있다. 그는 "상주에서 김정우 선배처럼 축구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맞이하고 제대하자는 마음으로 입대했다. 열심히 하다보니 기회가 온 것 같다. 지금이 내 인생 중 가장 중요한 시기같다"면서 "지금은 무조건 경기를 뛰고 싶은 마음 뿐이다. 내 수준이 높지 않다는 걸 알지만 경험을 쌓고 경기에서 뛰면 경쟁력이 생길수 있을 것 같다. 신인때는 국가대표를 꿈꿨지만 지금은 홍정남이라는 선수가 있었다는 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며 내일의 스타를 꿈꿨다.
하성룡 기자 jackiecha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