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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성 은퇴]33년의 마이웨이, 그는 선구자였다

박상경 기자

기사입력 2014-05-14 11:08



박지성의 축구 인생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시작됐다.

영본초 4학년 때 축구화를 처음으로 신은 박지성은 세류초로 전학한 6학년 때 전국대회 준우승으로 유망주들에게 주어지던 차범근 축구대상을 차지했다. 안용중-수원공고를 거친 뒤 명지대에 입학했다. 굴곡 많은 길이었다. 수원공고 1학년 시절만 해도 왜소한 체격으로 주전 자리는 언감생심이었다. 아버지 박성종씨가 개구리즙 등 각종 보약을 먹여 1년 사이 12cm가 큰 일화는 유명하다.

태극마크와의 인연은 박지성의 축구인생을 바꿔 놓았다. 명지대 시절 허정무 당시 올림픽대표팀 감독의 발탁으로 처음 대표팀 유니폼을 입었다. 이후 두드러지진 않지만 헌신적인 플레이로 각광을 받았다. J-리그 교토 퍼플상가(현 교토 상가)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것도 이때였다. 박지성은 명지대를 휴학하고 교토에 입단하면서 프로 무대를 밟았다. 당시 황선홍 홍명보 등 내로라 하는 스타들의 각축장이었던 J-리그에서 큰 존재감이 없었던 박지성이 두드러지기 힘들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 하지만 특유의 지치지 않는 체력과 적극성으로 주전자리를 꿰차면서 우려는 기우가 됐다.

은사 거스 히딩크 감독과의 만남을 계기고 박지성은 '전국구 스타'로 거듭났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준비하는 대표팀에 합류해 강철체력으로 주전 자리를 차지했다. 결국 본선 조별리그 최종전이었던 포르투갈전에서 감각적인 왼발슛으로 빅토르 바이아의 철벽방어를 뚫으면서 사상 첫 16강행의 일등공신이 됐다. 4강 신화의 영광과 함께 했다. 히딩크 감독은 한국을 떠나면서 이영표와 함께 박지성을 PSV에인트호벤(네덜란드)으로 데려갔다. 꿈에 그리던 유럽 진출의 서막이었다.

단꿈은 금새 깨졌다. 무리한 출전으로 부상을 했다. 들쭉날쭉한 플레이와 서툰 네덜란드어 능력은 곧 화살이 됐다. 팀 동료인 마르크 판보멀이 공개적으로 박지성의 활약에 물음표를 달았다. 홈 팬들도 박지성이 출전할 때마다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야유를 보냈다. 박지성의 축구인생 중 가장 힘겨운 순간이었다. 사정을 안 히딩크 감독이 주로 원정 경기에만 출전을 시키는 배려를 하지 않았다면 박지성의 현재는 없었을 지도 모른다.

실력으로 고비를 넘겼다. 히딩크 감독의 배려 속에 서서히 컨디션을 끌어올린 박지성은 2004~2005시즌 PSV의 간판으로 거듭났다. PSV는 아르연 로번과 마테야 케즈만의 이적 탓에 3위에 머물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승승장구 했다. 그 중심에 박지성이 있었다. 한때 박지성을 비난했던 판보멀은 인터뷰를 자청해 공개 사과했고, 팬들은 '위쑹빠르크(박지성의 네덜란드식 발음)'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유럽챔피언스리그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펼치면서 PSV를 4강까지 이끌었다. AC밀란과의 4강 2차전에서는 순간 돌파로 골망을 열었다. 당시 AC밀란과의 16강전에서 2연패하며 탈락의 쓴잔을 마셨던 알렉스 퍼거슨 맨유 감독이 박지성을 영입하게 된 계기다. 박지성은 히딩크 감독이 만류에도 당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최강 맨유행을 결정했다. 새로운 도전이었다.

맨유에서의 축구인생은 생존이 화두였다. 웨인 루니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라이언 긱스 등 세계적 스타들이 모인 팀에서 박지성의 존재감은 흐릿했다. 그러나 '두 개의 심장' '산소탱크'라는 별명처럼 지치지 않는 체력고 헌신적인 플레이로 인정을 받았다. 결국 데뷔시즌인 2005~2006시즌 12월 21일 버밍엄시티와의 리그컵 경기에서 데뷔골을 쏘아 올리면서 진가를 발휘했다.

다시 아픔이 찾아왔다. 소속팀과 대표팀을 오가는 장거리 비행은 박지성의 무릎 상태를 악화시켰다. 결국 2007년 부상으로 쓰러져 미국 콜로라도에서 수술대에 올랐다. 긴 재활을 마치고 복귀한 2008년 박지성은 성실한 플레이로 팀이 유럽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오르는데 일조했다. 그러나 첼시와의 결승전에서 퍼거슨 감독은 박지성 대신 오웬 하그리브스를 투입하는 결정으로 아쉬움을 남겼다. 하지만 박지성은 그 뒤로도 맨유에서 헌신하면서 아시아를 대표하는 유럽리거 역할을 했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서는 주장 역할을 맡으면서 허정무호의 사상 첫 원정 16강 달성을 이끌었다. 2011년 카타르아시안컵에 나서 비원의 우승 달성에 도전했으나, 3위로 마무리를 했다. 박지성은 카타르아시안컵을 마친 뒤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준다는 명분이었다.


맨유에서 200경기를 뛴 박지성은 2012년 7월 퀸스파크레인저스(QPR)로 이적했다. 날로 어려워지는 맨유에서의 주전경쟁과 QPR의 러브콜이 결합했다. 챔피언십(2부리그)에서 승격한 QPR의 마크 휴즈 감독은 박지성에게 리더 역할을 맡겼다. 그러나 박지성은 2012년 10월 에버턴전에서 무릎을 부상했고, 부진을 거듭하던 QPR은 결국 휴즈 감독을 경질하기 이르렀다. 해리 레드냅 감독이 후임자로 발탁됐으나, 박지성에게 이전과 같은 리더 역할을 맡기진 않았다. 팀 부진이 겹치면서 비난의 화살은 모두 박지성을 향했다. 하지만 레드냅 감독의 편견과 부진한 팀 상황에서 박지성이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박지성은 지난해 8년 만에 네덜란드 무대로 복귀했다. 1년 임대 조건이었다. 현역시절 막판 박지성과 함께 했던 필립 코쿠 감독의 적극적인 구애가 마음을 움직였다. 코쿠 감독의 바람 역시 박지성이 어린 PSV 선수들의 리더 역할을 해주는 것이었다. 박지성 역시 유럽챔피언스리그에 나서는 PSV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겠다는 생각이었다. AC밀란과의 유럽챔피언스리그 플레이오프를 통해 PSV 복귀전을 치른 박지성은 주장 역할을 맡으면서 팀을 이끌었다. 무릎 부상으로 오랜 기간 재활에 매달렸으나, 시즌 후반기에 복귀해 극도의 부진을 겪던 PSV가 리그 4위로 유로파리그 출전권을 획득하며 시즌을 마감하는 데 일조했다. 박지성은 PSV 1년 임대 연장과 QPR 복귀, 은퇴를 놓고 고심했으나, 결국 14일 축구인생을 마무리하겠다고 발표했다. 프로통산 321경기 출전 47골, A매치 통산 기록은 100경기 13골이다.
박상경 기자 ppark@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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