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밴쿠버동계올림픽, 고등학교 2학년, 열여덟살의 박승희(22·화성시청)는 여자쇼트트랙팀 막내로 나섰다. 설렘을 안고 떠난 첫 올림픽에서 잔인한 운명과 마주쳤다. 조해리 이은별 김민정 등 언니들과 함께한 3000m 계주에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지만, 석연찮은 심판 판정으로 실격했다. 중국에게 금메달을 내줬다. 예기치 못한 악몽에 눈물을 쏟았다. 올림픽 5연패의 역사가 막을 내렸다. '중국 에이스' 왕 멍은 3관왕에 올랐다. 한국 여자쇼트트랙은 18년만에 노골드를 기록했다. 박승희는 중국 에이스들의 견제속에 1500m, 1000m에서 동메달 2개를 목에 걸었다.
13일(한국시각) 러시아 소치 아이스버그 스케이팅 팰리스에서 펼쳐진 쇼트트랙 여자 500m 준준결선, 믿었던 심석희, 김아랑이 잇달아 탈락의 아픔을 맛봤다. '맏언니' 박승희는 나홀로 살아남았다. 동생들의 몫까지 해내야 했다. 비장했다. 준결선에서 몸놀림이 유난히 가벼웠다. 1조에서 42초611의 기록으로 1위를 차지했다. 단한번도 1위를 놓치지 않았다. 2위 아리아나 폰타나를 따돌리며 결선에 올랐다.
박승희는 그토록 꿈꾸던 결승 무대에서 혼신의 힘을 다했다. 첫번째 총성에서 긴장감 때문인지 한발 빠른 스타트를 끊었다. 2번째 총성에선 완벽했다. 1위 라인에 자리잡으려는 순간 안으로 파고들던 영국의 엘리스 크리스티와 이탈리아의 아리아나 폰타나가 충돌했다. 다시 일어나 끝까지 달렸다. 4위로 골인했지만 영국 선수가 실격됐다. 소중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16년만에 한국이 500m에서 획득한 귀한 메달이었다. 박승희는 밴쿠버에 이어 생애 세번째 올림픽 동메달을 따냈다.
박승희는 긍정적이고 낙천적이다. 운이 많이 따르는 쇼트트랙 선수에게 망각의 기술은 필수다. 전경기의 실수나, 불운은 빨리 잊을수록 좋다. 박승희는 그래서 좋은 선수다. 시쳇말로 '쿨'하다. 승부를 마음속에 오래 담아놓지 않았다. 세계선수권에서 왕 멍과 충돌해 넘어진 후, 10분만에 걱정하는 가족들에게 "나 괜찮아"라는 씩씩한 문자를 보냈다던 그녀다. 올림픽 무대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도 의연하고 담담했다. 그녀는 쿨했다.
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