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쪽상담소' 여경래, "6살 때 눈앞에서 아버지 죽음 목격…큰 충격" [SC리뷰]

김수현 기자

기사입력 2022-11-12 00:26 | 최종수정 2022-11-12 06:50






[스포츠조선닷컴 김수현기자] 여경래 셰프가 아픈 기억을 담담히 고백했다.

11일 방송된 채널A '오은영의 금쪽상담소'에서는 여경래, 여경옥 형제 셰프의 고민이 공개됐다.

형제의 중식 경력을 합치면 93년, 명불허전 중식계 대가 형제인 여경래 여경옥 형제가 찾아왔다. 화교 출신 형제 셰프는 호탕하게 웃으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중식 명장에 정형돈은 "다만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랐다"며 "중화요리계의 거목이다"라고 소개했다.

형인 여경래 셰프는 세계 중국 요리 연합회 회원 1300만 명 중 100인의 중국요리 명인으로 인정 받았다고. 냉장고에 하나쯤 있는 감칠맛 치트키인 굴소스 회사에서 최고의 셰프를 고문으로 영입한다는 사실이 내려왔는데 여경래 셰프가 18년째 참여하고 있었기도 했다. 최경래 셰프는 "중식 셰프들 사이에서는 굉장한 영광이다"라며 흐뭇해 했다.

동생인 여경옥 셰프는 35년간 청와대 출장 대통령 식사 담당을 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여경옥 셰프는 24년 간 S호텔 수석 셰프로 근무하기도 했다. 조리직으로는 업계 최초, K호텔 이사로도 일했다.

'가장 자신있는 요리'에 여경래 셰프는 '탕수육'을 꼽았고 "셰프들 간의 자존심이 있다. 형제여도 지는 건 싫다"라며 승부욕을 보였다. 여경옥 셰프는 "탕수육 빼곤 내가 다 잘한다"라며 여유있게 맞받아쳤다.





오직 '금쪽상담소'를 위해 형제가 직접 요리를 해주기로 했다. 45년차와 48년차의 요리, 여경옥 셰프는 "오늘은 제가 보조다. 모자새우는 형한테 안된다"라며 겸손하게 말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새우의 맛에 모두 '진실의 미간'을 보였다.

여경래 여경옥 셰프의 제자 박은영은 자기가 제보를 했다며 "항상 긍정적이시다. 부하직원과 트러블이 있으면 '각자 사정이 있겠지~'라 하신다. 또 단골 중에 진상이 있으면 '그래도 우리가 참아야지~'하는 식이다.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린다"라며 "또 받아야 할 돈도 못받는다"라며 '긍정적이다 못해 호구 같은 형제'에 대해 인터뷰 했다.


좋은 기분을 유지하기 위해 사탕을 물고 자던 여경래, 여경옥은 "형이 그정도로 노력을 많이 했다"라며 공감했다. 여경래는 "저희가 주식을 한지 오래됐다. 실전투자 대회에서 동생이 1등을 해서 고가의 세단을 받았었다. 그래서 믿었는데 한 번 물린 적이 있다"라고 폭로했다.

여경래는 "이런 부정적인 얘기도 원래는 잘 안하려고 한다. 자꾸 잊으려고 한다"라 했지만 결국 "잊혀지진 않는다"라고 실토했다. 여경래는 "탓할 일은 아니다. 내 책임이다"라 했고 여경옥은 "저도 같이 물렸다. 그리고 형이 500만 원 용돈으로 줬다"며 형 자랑도 했다.

의좋은 여형제는 '의견차이로 다툰 적은?' 질문에 여경래는 "저희가 둘 다 호텔 주방장 출신이라 가게가 잘 됐었다. 경력이 쌓이다보니 보이지 않는 자존심이 생겼다. 의견충돌이 있어서 결국 각자의 길을 가게 됐는데 3,4년 지나고 보니까 둘이 있을 때 더 시너지가 났던 게 생각나더라"라 밝혔다. 여경옥은 "난 갈등이라 생각 안했다. 나는 각자의 의견대로 조율했다고 생각한다. 형이 대부분 양보한다"라 했다.





여경래는 "어릴 때 제가 잘못해서 어머니께 맞고 있으면 '형이 잘못한 건 나 때문이다'라고 감싸줬다. 그런 부분들 때문에 서로 사이가 좋은 거 같다"라 했고 여경옥은 "제가 그렇게 하면 어머니가 마음이 아파서 더 못때리시지 않냐"라며 끈끈한 형제애를 보였다. 오은영 박사도 눈시울이 붉어지는 형제의 우애.

오은영 박사는 '긍정'에 대해 "안좋은 상황을 좋게 해석하는 것은 '왜곡'이다"라 지적하면서 문제가 있을 때 잘못된 것을 제대로 인지하고 인정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오은영 박사는 형제의 어린시절에 대해 물었다. 여경래 셰프는 "어린시절 '극빈자 가족'이었다. 심각하게 가난했다. 제가 6살, 동생이 3살일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남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셔야 했는데 당시 막걸리 장사를 하셨다. 동생과 저는 먹을 게 없어서 막걸리에 설탕을 넣어 마시기도 했다"라 말문을 열었다.

화교학교는 학비를 내야 했지만 낼 수가 없었고 잡비조차 못 냈다고. 여경래는 "여름 교복을 입어야 하는데 사줄 돈이 없어서 저 혼자만 사복을 입고 등교했다. 담임선생님이 제 사정을 알고 반 친구들의 도움으로 여름교복을 사주셨다. 철 없는 시절에 어머니께 자랑을 했었다"라 했다.

여경옥은 "저는 비오는 날이 싫었다. 집에 물이 그렇게 샜다. 근데 40대 되고 먹고 살만 하니까 '비 오면 커피 한 잔 하면 되겠네'"라 웃으면서 추억했다. 여경옥은 "가끔 멋있는 노신사가 지나가면 저분이 '내가 네 아빠다'라 하지 않을까 하고 상상했다"라며 아버지를 그리워 했다.





여경래는 "12월 겨울날 영화를 보러 나갔는데 어머니와 저를 먼저 버스에 태우고 아버지가 뒤에 오시는 걸 제가 보고 있었는데 차가 와서 아버지를 치더라. 아직도 6살 때 한 얘기가 기억나는데 '엄마, 아버지가 죽었어'라 했다. 오래된 이야긴데"라며 눈앞에서 아버지의 사망 사고를 목격한 아픔에 대해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여경래는 "얘기하다보니 조금 격해진다"라며 울컥했다. 이어 "태어났을 때부터 운명적으로 정해져있구나 싶었다"라며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 했다.

여경래 셰프는 "환경적인 요소가 많은 것 같은데 중학교 졸업 후에 어머니가 '학교를 더 보내줄 수 없으니 기술을 배워라. 서울에서 왕서방 아저씨가 오시니 따라가라'라 하셨다. 저는 고등학교에 다니고 싶어서 일주일을 울었다. 이런 악의 구렁텅이에서 나를 꺼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다"라며 고백했다.

여경래 셰프는 책임감이 심각하게 강하기도 했다. 살면서 누구에게도 기대 본 적이 없다는 여경래는 "동생이라 해도 기댈 순 없다"라 밝혔다. 여경옥은 "오지랖도 넓다. 오늘도 외국에서 온 친구 데려다 주고 왔다. 본인이 안되면 저나 아들들을 시키기도 한다"라며 공감했다. 그런 여경옥도 형에게 기대지는 않았다.

오은영 박사는 "여경래 셰프님은 '근원적 수치심' 때문에 더욱 긍정적으로 사신 것 같다. 이해심이 많은 나로서 존재해야 비로소 나는 좋은 사람이라 생각한 거다. 결국 존경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라 분석했다. 여경래 셰프는 "살아오면서 확신이 없었는데 박사님 얘길 들으니 앞으로 더 그렇게 해야할 것 같다"라며 반전 소감을 해 웃음을 자아냈다.

shyun@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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