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꿈이 없는 시대. 문제다. 꿈이 없는 사람은 껍데기 뿐이라고 했던가. 꿈은 바로 희망의 다른 말이기 때문이다.
희망은 마음의 밥이다. 밥을 먹지 않으면 몸이 말라가듯이, 희망이란 산소가 끊기면 마음도 말라간다. 꿈 없는 자, 살아도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란 말은 여기서 나온다.
미래가 불안할 수록 사람들은 꿈 대신 도피처를 찾는다. 그 중 하나가 과거다. 지나간 일, 과거는 신기한 힘이 있다. 좋은 점, 나쁜 점 50대50 쯤 됐을 터인데 지나가는 순간 좋은 점 비중이 확 늘어난다. 머리 속에서 나쁜 기억은 서서히 필터링된다. 인간의 뇌에는 그런 절묘한 망각 기능이 있다. 일종의 자기 보호 장치다. 힘든 기억을 어느 정도 떨쳐내지 않고서는 살기가 힘들다. 머리를 비워야 간신히 살아갈 수 있는 사람도 있다. 젊은 시절 유독 극복하기 힘든 기억이 있는 사람들이 건망증이 더 심해질 가능성이 많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무튼 아름답게 미화된 과거의 기억은 추억을 부른다. 현실이 고통스러울 수록 추억 의존증은 심화된다.
최근의 문화적 복고 열풍. 이와 무관치 않다. 문화는 물리적 형체가 없는 재화지만 매직아이처럼 집중하면 조금씩 눈에 보이는 흐름이 있다. 문화 전파의 최일선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그걸 놓칠 리 없다. 그들이 이미 수년 전부터 주목한 것은 '복고'다. 꿈이 없는 시대와 복고 열풍은 밀접한 상관 관계가 있다.
'문화는 CJ가 제일 잘하는 일이니까요'. 문화 전도사를 자처하는 CJ 그룹의 광고 문구다. 문화 컨텐츠 핵심에 CJ E&M이 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CJ는 문화컨텐츠를 자본으로 연결시키는데 가장 촉이 발달한 그룹이다. 대중의 관심은 곧 돈이다. 정확하게 캐치했다. tvN의 '응답하라' 시리즈는 그렇게 탄생했다. 드라마 속에 삽입됐던 그 때 그 시절 음악들이 음원시장까지 강타했다. 케이블 발 복고 열기. 강한 전파력을 지녔다. 삽시간에 방송, 영화, 음악계 등 문화계 전반에 구석구석 여파를 미쳤다.
|
영화계도 복고 열풍을 비껴갈 수 없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과거 이야기'들이 스크린을 가득 메웠다. 1000만 대열에 합류한 '변호인', '명량', '국제시장'. 공통점은 하나. 그 때 그 시절, 그 때 그 인물, 그 때 그 희생과 리더십에 대한 향수가 서려있었다.
스크린 복고 열풍. 현재 진행형이다. 강남 개발사를 다룬 김래원, 이민호 주연 영화 '강남 1970'(감독 유하). 개봉 후 줄곧 박스오피스 1,2위를 다투고 있다. 개봉 5일만에 100만 관객도 돌파했다. '청소년 관람불가'란 핸디캡 속에서도 초반 기세가 눈여겨 볼만 하다. 하지만 지속 가능한 흥행을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있다. 포크 음악이 유행하던 그 때 그 시절 아련한 추억이 오롯이 담긴 영화 '쎄시봉'이다. '시라노; 연애조작단', '광식이 동생 광태' 등을 통해 사랑의 섬세한 감정선에 대한 탁월한 조율감각을 과시한 김현석 감독이 그 시절의 감성을 당시의 배경과 음악 속에 절묘하게 녹여냈다. 다음달 5일 개봉할 이 작품의 흥행 가능성.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추억의 핵심은 '사랑'. 그 중 으뜸인 '첫 사랑'을 다룬다. 잊혀졌던 추억의 입맛을 돋구는 가장 강력한 장치인 '음악'을 배경으로 깔았다. 1960~1970년대를 다룬 '응답하라' 극장판 쯤 된다. 관객 범위가 꽤 넓다. 일단 음악이 친숙하다. 다이렉트로 가슴 속에 스며들 '어르신' 뿐 아니다. 어느덧 문화 소비의 거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40~50대 관객층에도 무난한 연착륙을 할 가능성이 높다. 스토리 완성도나 반전 흐름도 무리가 없다. 실존 인물과 허구와의 조화도 무난하다.
주위를 둘러봐도 벽처럼 암담하게 느껴지는 답답한 현실. 한때 꿔봤으나 슬그머니 마모돼 버린 꿈, 미처 꿔보지도 못한 꿈의 도피처로서의 추억 마케팅. 그 상업적 연결고리를 의식하면 씁쓸함이 남는게 사실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추억마저 없다면 우리 인생이 너무 불쌍하잖아요"라고 속삭이던 '모래시계' 혜린(고현정)의 대사가 자꾸만 곱씹어지는 것을….
정현석 기자 hschung@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