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오래, 가장 잘하는 선수로 기억되는 것'은 세상 모든 운동선수들의 로망이다.
쉽지 않은 꿈이다. 반짝 잘하는 선수는 많지만, 세월엔 장사 없다. 때론 부상이 발목을 잡고, 팔팔한 후배들이 호시탐탐 치고 올라온다. 극한의 훈련을 버티다 보면 슬럼프도 수시로 찾아온다. 나이가 들수록 유혹도 많고 포기도 빨라진다.
세월을 거슬러 가장 오래 가장 잘하는 선수, 여자펜싱 남현희(36·성남시청, 세계랭킹 9위)의 이름 석자는 그래서 더욱 빛난다. 혹자는 '독종'이라고, 혹자는 '악바리'라고 한다. 그녀는 그 이상이다. '반박불가' 위대한 여성 펜서다. 나이, 신체조건, 일-육아를 병행해야 하는 환경 등 온갖 핸디캡을 극복하고 매대회 시상대 꼭대기에 오르는 그녀는 '전무후무' 한국 여자 펜싱의 레전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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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플뢰레 대표팀 남현희 전희숙 김미나 홍서인(사진 왼쪽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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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홍콩아시아펜싱선수권 조직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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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여섯, '여전히 목마른' 열정의 승부사
"너무 아쉬워요. 왼손 훈련이 너무 부족했어요." 지난 16일 홍콩 아시아선수권 개인전에서 은메달을 딴 후 남현희는 진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결승에서 중국의 왼손잡이 장신 톱랭커 후오싱신(21·세계랭킹 24위)에게 7대15로 패했다. 경기 초반 남현희는 신장의 열세를 극복하고자 21세 왼손 에이스를 상대로 특유의 빠른 공격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기선제압을 노렸다. 그러나 왼손 대 왼손의 싸움에서, 맘처럼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분위기가 꼬였다. 점수차가 벌어졌지만 남현희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1포인트라도 따라잡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경기 후 자신의 패배를 냉정하게 복기했다. "무턱대고 너무 열심히만 움직였다. 그동안 왼손 상대가 너무 없었다. 내가 가진 것을 다 보여주지 못했다." 서른여섯의 펜서는 여전히 열정적이다. 매경기 자신의 부족한 점을 집요하게 복기한다. '왜 안됐을까' '왜 졌을까' 분석하고 보완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한다. 남현희는 남몰래 간직한 꿈을 털어놨다. "아쉽지만 94번째 메달이라는 것을 위안 삼아야겠다. 국제대회에서 100개의 메달을 채우고 은퇴하고 싶다. 매 대회가 내게는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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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승부사' 남현희와 박상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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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번의 찌르기, 역전 우승을 이끌다
사흘 뒤인 19일 밤 이어진 아시아선수권 여자 플뢰레 단체전은 '왜 남현희인가'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무대였다. 일본과의 결승전은 기적 승부였다. 15-16으로 밀리던 5피리어드, '맏언니' 남현희가 등장했다. 일본의 아주마 세라를 10-0으로 돌려세웠다. 남현희가 10번을 연거푸 찌르는 동안 일본 선수는 속수무책 서 있었다. 15-16의 열세를 25-16의 승리로 뒤집어놓는 그녀의 칼끝은 '마법'이었다. 입이 딱 벌어졌다. 리우올림픽 '펜싱스타' 박상영의 "할 수 있다" 금메달을 연상케 했다.
우승을 결정짓는 마지막 포인트도 결국 그녀의 몫이었다. 45대30, 짜릿한 우승을 확정한 후 남현희는 전희숙(33·세계랭킹 19위), 홍서인(29·세계랭킹 50위, 이상 서울시청), 김미나(30·인천중구청·세계랭킹 22위) 등 후배들과 끌어안고 포효했다. 개인전 은메달의 아쉬움을 훌훌 털어내고, 활짝 웃었다. "아시아선수권 14번째 메달, 국제대회 95번째 메달이에요! 득점도 많이 해서 너무너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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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알제리 펜싱월드컵에서 극심한 신장의 열세를 극복하고 당당히 2위에 오른 1m55의 작은 거인 남현희. 작고 빠른 발로 1m75가 넘는 유럽선수들과의 칼싸움을 승리로 마무리하는 기적의 아이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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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펜서' '땅콩펜서' 그녀가 위대한 이유
남현희는 2001년 아시아선수권 첫 개인전 금메달(단체전 동메달)을 시작으로 2009~2012년 대회까지 개인-단체 2관왕, 4연패 대기록을 세웠다. 2013년 출산 후 2년만에 출전한 2014년 수원 대회에서 또다시 개인, 단체전 2관왕에 올랐고, 2015년 싱가포르 대회에서 단체전 금메달, 개인전 은메달, 지난해 중국 우시 대회에서 개인전 금메달, 단체전 은메달을 따냈다. 이번 대회 단체전 금메달, 개인전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매대회 결승에 진출했다. 스무살 '소녀 펜서'가 서른여섯 '하이엄마'가 된 지난 16년간, 단 한번도 정상을 놓치지 않았다.
남현희의 쾌거는 환경과 조건의 어려움을 극복해낸 결실이기에 더욱 위대하다. '땅콩검객'이라는 별명대로 1m55의 작은 키, 215㎜의 작은 발로 세계를 평정했다. 발에 맞는 펜싱화가 없어 깔창을 두세 개 깔고 피스트에 오를 때도 있었다. 20년 가까이 혹사한 무릎엔 때론 물이 차고, 때론 극심한 통증도 찾아오지만, 그녀는 멈출 뜻이 없다. 결혼, 출산 등 환경의 변화속에도 그녀는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
알려진 대로 그녀는 공하이의 엄마다. 사이클 국가대표 출신 공효석(국민체육진흥공단)과의 사이에 예쁜 딸을 뒀다. 2013년 4월 하이를 낳은 지 60일만에 피스트에 올랐고, 이듬해 아시안선수권, 인천아시안게임에 출전해 개인전 은메달, 단체전 금메달을 따냈다.
모든 종목, 선수들이 나이가 들면 꼭 한번쯤 듣는 얘기가 있다. '후배들에게 길을 터줘야 한다.' 그러나 후배를 능가하는 성적, 철저한 자기관리 앞에 그 논리는 힘을 잃는다. 오히려 '엄마펜서','땅콩펜서' 남현희의 분투는 여자 후배들은 물론 경력단절 여성, '유리천장' 아래 고민하는 또래 여성들에게 길이 되고 힘이 된다.
남현희는 요즘 소속팀 성남시청과 대표팀에서 홍효진, 김미나 등 20대 후배들과 함께 뛰는 것을 즐긴다. 어릴 때는 눈앞의 승부에 얽매여 주변을 돌아보지 못했다. 베테랑이 되고 나니 큰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오랜 국제 경험을 통해 몸으로 체득한 노하우를 후배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 크다. 한국 펜싱 사상 최초로 올림픽 4회 출전의 역사를 쓴 리우올림픽 후 남현희는 또렷한 이정표도 설정했다. '국제대회 메달 100개', 아직 5개가 남았다. 내년 5회 연속 아시안게임 출전을 꿈꾸는 이유다.
한편 대한민국 펜싱대표팀은 남현희 등 에이스들의 활약에 힘입어 금메달 7개, 은메달 6개, 동메달 5개로 종합우승했다. 금 4, 은1, 동6에 그친 2위 중국을 제치고, 압도적이고 절대적인 대회 9연패의 위업을 이뤄냈다. 남녀 플뢰레, 에페, 사브르 개인전, 단체전 12개 전종목에서 결승에 진출하며 '펜싱코리아'의 힘을 재확인했다.
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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