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남자] 조국과 동포 (30)
기사입력 2000년 04월 06일 14시 07분
아침 9시 정각에 동양호텔의 로비에는 관광객 42명이 다 모였다. 그중 7명은 이대진과 고윤희, 그리고 5명의 노인들이었는데 인솔자인 여행사 직원 2명 주위에 둘러섰다.
"먼저 와 계신분들도 다 오셨구만요."
선임자로 보이는 40대 직원이 노인들과 이대진 등을 둘러보고 웃었다.
"시간을 딱 맞춰 주셔서 고맙습니다."
"버스는 몇시에 출발합니까?"
선글라스를 낀 이대진이 짜증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긴 물가가 비싸서 어서 떠나야겠어요."
그러자 할머니 서너명이 수근댔는데 그 속에 김성복 노인이 끼어 있었다. 손목시계를 내려다본 직원이 말했다.
"버스는 벌써 와 있습니다. 체크아웃 마치고 바로 떠납니다."
로비 안에는 일본인 노인 관광단도 한떼가 있었으므로 혼잡했다. 이대진의 옆에 붙어서있던 고윤희가 낮게 말했다.
"고급품으로 치장한 효과가 있는 것 같네요."
고윤희의 시선을 쫓아간 이대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노인 셋은 이미 할머니 셋과 짝이 만들어져 있었고 나머지 노인 둘 옆에도 할머니가 넷이나 모여 있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따라온 노인 둘은 싸구려 점퍼 차림인데 반해 다섯 노인은 모두 버버리나 빈폴등 고급 옷으로 치장했고 아침에 호텔 이발소에서 산뜻하게 머리도 깎았다.
노인들은 할머니들의 환심을 사기위해 적극적이었다. 할머니들은 그것이 고향으로 귀환하기 위한 작전인지도 모른채 노인들의 노골적인 접근에 들뜬 표정들이다.
체크아웃을 마치고 버스에 오른 것은 그로부터 30분쯤 후였다. 버스가 출발하자 앞쪽에 선 직원이 말했다.
"오늘은 산동성까지 내려가 황하를 구경하고 1박합니다."
그리고는 능숙하게 산동성의 유명 관광지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베이징 시내를 벗어나기 전에 검문소가 있어요."
옆에 앉은 고윤희가 말했다. 그들은 끝쪽 자리에 앉아 있었으므로 앞쪽이 다보였다.
"베이징을 빠져 나가는 모든 도로가 통제되어 있어서 피할 수 없어요."
"따로 하나씩 빠져 나갔다가 검문소를 지나서 다시 합류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요?"
이대진이 소리죽여 묻자 고윤희가 머리를 저었다.
"택시도 검문하는 상황이라 오히려 그것이 더 위험해요."
그리고는 고윤희가 눈으로 앞쪽 자리를 가리켰다.
"그리고 일행들이 의심하게 도면 더 곤란해집니다. 공안들의 눈치가 비상하거든요. 특히 탈북자 색출에는 전문가들이 많습니다."
"난 잠이나 자겠소. 어젯밤에 과로를 한 것 같아서."
의자에 머리를 붙인 이대진이 곁눈으로 고윤희를 보았더니 왼쪽 귓볼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제는 어깨를 맞대고 있어도 어색함이 사라졌고 버스가 흔들릴 때 고윤희의 무릎과 다리가 닿을 때마다 다시 욕정이 솟아 올랐다.
눈을 감은 이대진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기가 떠올랐다. 각본대로 둘 사이는 남이 보아도 감쪽같은 신혼부부가 되어있는 것이다.
이만하면 어젯밤의 성애(性愛)에 호기심이 가득찬 시선을 보내는 타인들의 기대를 만족시킬 만한 신혼부부이다.
"당신은 승부욕이 너무 강해요."
혼잣소리처럼 말했던 고윤희가 갑자기 이대진의 팔을 흔들었다.
"검문소예요."
눈을 뜬 이대진을 가까워져 오는 검문소를 보았다. 10여명의 무장 공안원이 서 있는 검문소로 버스는 속력을 떨어뜨리며 다가갔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