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리포트] 이종범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에 대해
기사입력 2000년 03월 21일 14시 42분
작년 여름 선동열의 진로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을 때, 주니치구단과 매우
가까운 일본인이 내게 아주 기가막힌 얘기를 전해줬다. 주니치구단 관계자
들이 한국사람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내두른다는 것이었다. 이유를 물어보
니 해태와 선동열의 이적료를 놓고 주니치가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것이었
다(당시 일본을 오가는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선동열과 주니치의 재계약 시
점에 맞춰 해태가 법적으로 아무 근거없는 이적료를 다시 요구하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해태는 이미 선동열의 주니치입단시 2억엔의 이적료를 받
은 바 있다).
나고야에 연고지를 두고 있는 주니치는, 한국선수가 가장 많은 구단으로
서슴없이 꼽힐만큼 친한파 구단으로 유명했다. 이를 두고 일부 재일동포들
과 일본인들은 호시노 감독이 재일동포이기 때문에 한국선수를 많이 받아들
인 것이 아니냐고 분석하는 이도 있었다.
그런데 지난 여름부터는 그런 우호적인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선동열,
이종범, 이상훈의 대활약이 아니었으면 주니치의 우승을 장담할 수 없을만
큼 한국선수들이 큰 기여를 했는데도 주니치는 예전같은 분위기로 돌아오
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선동열이 은퇴선언을 하고 이종범이 2군으로 가느
니 마느니 말들이 많은 상황에서 호시노 감독의 강연장 폭탄선언으로 사실
상 이종범의 2군행이 확정되는 비극적인 사태가 벌어졌다.
그리고 이종범의 항변이 있었다. 그 때 이종범은 호시노감독과 담판을 짓
기 위해 오키나와로 떠난다고 국내신문에 크게 보도됐다.
어느 독자의 말대로 시즌이 끝난 캠프에 다른 외국인 선수가 간 적이 있느
냐, 아버지의 병환 때문에 못 간 이종범 만 왜 문제를 삼느냐라는 항변은
분명 일리가 있었다. 나도 사석에서는 그같은 주니치의 처사에 대해 똑같
이 분노했다. 하지만 매사에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독자들이 지적하듯 비
인간적일 정도로) 행동하는 일본인들을 상대로 우리가 이기려면 때를 기다
려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 후에도 한국스포츠신문에는 계속해서 이종범에 대한 동정이 계속 보도
됐다, 그런 차제에 지난번 시범경기가 시작되고 이종범의 활약이 있엇다.
한국의 최고선수답게 그의 능력이 마음껏 발휘된 시합이었다. 솔직히 모두
들 1군으로 다시 올라가게 되지 않을까 혹시나 하고 희망을 가졌었다. 그러
나 다시 2군행….
내가 이종범에게 편지를 쓴 목적은 절대로 그의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을
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무언가 도움이 되는 말을 해주고 싶었다. 물
론 절망에 빠진 그에게 변함없는 성원과 아낌없는 격려, 그리고 따뜻한 위
로가 필요하다는 걸 모르는 바도 아니다. 사실 나도 일본인들을 만나면 이
종범의 입장에서 얘기를 한다. 왜 있지 않은가. 한마디라도 우리나라 사람
에 대해 우리가 말하면 괜찮은데 일본인들이 뭐라하면 괜히 피가 거꾸로 솟
는 것. 이종범 이야기만 나오면 펄펄 뛰며 일본사람에 대드는 덕분에 나는
`싸움잘하는 여깡패'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뒤돌아서면 나는 내심 그들의 말
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감독의 지시에 일일이 반응하다보면 뛰어
난 제 능력 보다는 오히려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프로에는 국적이 없다. 그런데도 한국의 많은 독자들은 여전히 민족차별
운운한다. 잘못된 생각이다. 단지 이종범과 주니치와의 문제일 뿐이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일부언론과 신문들은 이상하게도 민족감정을 부추
겨 이종범의 2군행에 민족차별을 결부시키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이같은
왜곡된 감정표출은 오히려 이종범의 입지를 더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렇다고 호시노 감독이나 주니치에 비위를 맞춰야 한다는 얘기는 전혀 아니
다. 이종범이 실력이 있는 선수니만큼 지금은 억울하더라도 참고 때를 기다
려야 하지 않겠느냐는 게 내 의견이다.
격려와 위로는 얼마든지 좋다. 그렇지만 민족감정은 금물이다. 이종범과
호시노 감독의 갈등만 더 부채질할 뿐이다. 그래서 본국에서 너무나 많은
이들이 민족차별 운운하기에 내가 편지형식의 글을 빌어 쓴 것이다. 누군가
는 꼭 알려주어야 했기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고 했다. 내 글이 조금이라도 좋은 약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종범 선수가 그라운드를 펄펄 나는 모습을 기대하며.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