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리포트] 일본남자는 괴로워
기사입력 2000년 02월 22일 14시 04분
며칠 전 취재할 일이 있어 신바시에 있는 일본인 사무실에 갔을 때였다. 그날 나는 초행길이어서 주소를 가지고 목적지인 사무실을 찾고 있었다. 오피스타운으로 알려진 신바시 빌딩숲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는데 가는 곳마다 이상한 일본남자들이 눈에 띄었다. 그날따라 도쿄는 보기 드물게 강풍을 동반한 매서운 날씨였고, 거리의 행인들은 길가에 세워놓은 자전거들이 바람에 쓰러지는 것을 피해 건물쪽으로 바싹 달라 붙어 걸어가고 있었다(그 전날 서울은 영하 10도였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 40∼50대 남자들이 건물 입구에서 삼삼오오 모여 어깨를 움츠린 채 서성대고 있었다. 맨처음 이같은 모습을 보았을 때는 그저 누군가를 기다리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옆 빌딩을 가도 똑같은 모습의 중년남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이상하다 싶어 유심히 살펴 보았더니 그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나이가 40∼50대라는 것. 모두 양복차림의 화이트컬러라는 것. 또 모두 담배를 물고 있었다는 것이다.
"왜 건물마다 저렇게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는 거죠?"
참다못해 내가 19층 건물에 들어가 안내원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 안내원이 약간은 짖꿎은 표정으로 실실 웃으며 답했다.
"그분들이요? 담배 피우고 있는 거예요. 자 보세요, 모두들 담배 피우고 있잖아요."
이렇게 큰 건물에 흡연실 하나 없느냐고 묻자 안내원이 말했다.
"원래 있었는데 없앴죠."
마침 그날 약속한 이가 오타 부장이라는 남자여서 만나자마자 담배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일본 남자만큼 괴로운 이는 없을 겁니다. 그래도 전에는 복도 끝을 흡연구역으로 지정해 주었는데 올해부터는 그것마저도 아예 없애버렸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회사 현관 밖에 임시로 재떨이를 갖다놓고 추위에 떨면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겁니다."
어느새 다가와서 우리들 얘기를 듣고 있던 입사 8년차의 30대 남자 왈, 자기집의 저녁식사 당번은 늘 자신이라는 것이었다. 결혼전에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오타 부장은 한 술 더 떴다.
"이 다음에 늙어서 이혼 안 당하려면 약속한 밥당번 제대로 지켜!"
"아! 오토코와 츠라이요(일본 남자는 괴로워)!"
30대 부하직원이 오타 부장의 말을 듣고 외친 말이다. 이 말은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가장 좋아했다는 일본 영화의 시리즈 제목이다. `도라'라는 별명을 가진 남자배우가 생전에 `오토코와 츠라이요'라는 영화 한편에만 출연했을 정도로 일본의 국민적 인기를 끌었던 시리즈다. 훗날 이 영화는 일본영화의 시리즈 붐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아무튼 영화제목처럼 요즘 일본 남자들은 어디를 가나 괴롭다고 아우성이다.
젊은이들은 남녀평등 운운하며 무슨 일이든지 절반씩, 가사도 나눠서 하지 않으면 안된다. 중년들은 중년들대로 회사와 가정 안팎으로 휘둘림을 당한다. 기가 세진 `마누라'와 자식들의 비위 맞추기에 여념이 없다. 노인들은 오타 부장 말대로 밥 한 끼라도 따뜻하게 얻어 먹으려면 처음부터 저자세를 취해야 한다. 부인에게 억울하다고 반발했다가는 `보따리'를 싸야 되기 때문이다. 부인이 집을 나가라면 그만이다.
그러나 `남성 수난 시대'를 바라보는 일본 여성들의 시각은 다르다.
"일본 남자의 기가 약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내면까지 달라지진 않았어요. 남성 중심 사회에서 당했던 여성들의 일방적인 희생에 대해서는 조금도 반성하지 않고 있는 거죠. 다만 지금까지 누려왔던 기득권을 잃자 슬퍼하고 있는 것 뿐이죠. 남녀평등이 이뤄지려면 아직 멀었어요.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더 많이 내놔야 합니다."
그날밤 나는 오타 부장이 소속해 있는 회사 직원 7명이 남과 여로 나뉘어 `패싸움'을 하는 것을 심판 아닌 심판이 돼 지켜봐야 했다.
하지만 결과는 역시 `오토코와 츠라이요'. 밖에서 오들오들 떨면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중년 샐러리맨들의 모습이 너무도 불쌍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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