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재] 영화 '플란다스의 개'서 나약한 시간강사역 맡아
기사입력 2000년 02월 11일 13시 55분
3년전 방송국에서 그를 처음 봤을 때 멜로 전문 배우 한명이 떴구나 생각했다. 깨끗한 이미지, 선한 웃음. 전형적인 `킹카'였다.
그런데 그후 스크린으로 무대를 옮긴 그의 행보가 좀 `이상했다'.
성질 더러운 군인(`미술관 옆 동물원')으로 스크린 데뷔작을 장식하더니 건달(`주유소 습격사건')로 나오지를 않나. 그런데 이것도 못참아 이번엔 백수건달 일보직전이다.
19일 개봉되는 `플란다스의 개'(봉준호 감독－우노필름 제작)에서 능력없는 시간 강사 윤주로 나온다. 학장에게 뇌물로 줄 돈 1500만원을 꾸느라 전전긍긍한다. 종이 한가득 친구 이름을 써놓고 매일 전화 돌리는 게 중요 일과다.
이러다보니 괜히 옆집 개 짖는 소리가 문제가 된다. 애꿎은 개를 처치하는 걸 필생의 목표로 삼고 동분서주한다.
이 과정에서 눈물과 웃음을 동시에 자극하는 장면이 속출한다. 만삭의 아내에게 빌붙어 사는 그가 외출 허락을 받으려고 호두를 목숨 걸고 까는 장면. 별 볼일 없는 나약한 지식인의 모습 그대로다.
개를 목 매달아 죽이려다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고 놀라서 손을 놓아버리는 장면, 촌지로 준비한 1500만원에서 만원을 살짝 빼서 거지에게 주는 장면. 따뜻한 마음만은 아직 사라지지 않은 우리네 모습이다.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에요. 영화를 볼 때 보다 보고 돌아나올 때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온기 속에 웃음을 전달하는, 참 따뜻한 영화에요."
한살 차이인 봉준호 감독은 배우를 편하게 해주는 스타일. 촬영 시작전에 반드시 `아침 조회'를 하며 의견 교환을 했다.
여기에 무명 시절의 경험을 더했다. MBC 공채 탤런트로 입사 이후 1년간. 한달에 3∼4일 빼고는 집에서 뒹굴 뒹굴, 방바닥 청소는 그의 몫이었다. 체육복, 슬리퍼가 기본 옷차림. 만화책 비디오에 둘러싸여 살던 그때 그 느낌을 담았다. "왜 내 능력을 인정해주지 않냐"며 화도 내 보고, 울리지 않는 전화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심정 그대로.
그래서 그의 연기는 아주 사실적이다. 극 초반, 다리 사이에 두 손을 넣고 잔다. 진짜 한심해 보인다. 이야기가 중반을 넘어서자 그는 아내의 등을 살살 긁어주면서 잠이 든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장면. 이렇게 자는 모습 하나까지 고민을 했다.
"일상을 가장 일상적으로 그려내야 하는 게 더 어렵더라구요. 어깨의 힘을 빼고 최대한 편하게 연기를 했습니다."
이성재의 다음 작품은 `신라의 달밤'(강우석 감독－시네마서비스 제작)이다. 거기에선 깡패로 나온다.
이젠 그가 어떤 배우냐고 물으면 최소 1분은 망설일 것 같다. 그리곤 이렇게 대답하겠다. "틀이 없는, 아메바 같은 배우"라고.
[전상희 기자 frog＠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