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소설] 폴라리스 랩소디(26)
기사입력 1999년 03월 30일 15시 46분
라스 법무대신은 선실을 거닐면서 초조한 표정으로 선실문을 바라보았다. 좌로 세 걸음, 우로 세 걸음. 무의식 중에 선실의 넓이를 재고 있던 라스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앉았다.
라스와 왕녀가 숨어있던 선실로 느닷없이 들이닥친 시커먼 갑옷의 해적은 라스를 한 방에 기절시켰었다. 한참 지난 후, 정신을 차린 라스는 세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코뼈가 내려앉았고, 율리아나 왕녀가 사라졌고, 자신은 이곳에 감금되어 있다는 것. 라스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아아, 왕녀는 어떻게 된 것일까.
그 때 문이 벌컥 열렸다. 깜짝 놀란 라스가 바라보는 가운데, 선실로 들어선 해적들은 끌고 온 사내를 바닥에 집어던지고는 아무말 없이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라스는 해적들의 등을 향해 외쳤다.
"여, 여보게. 이봐！"
그러나 해적들은 무정하게 문을 닫았다. 철컹. 밖에서 빗장 채우는 소리가 들리자 라스는 좌절하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바닥에 쓰러진 사람이 호위대장 슈마허인 것을 알고는 다시 놀랐다.
"슈마허경?"
라스는 황급히 슈마허를 부축하여 침대에 눕혔다. 슈마허의 어깨에는 붕대가 감겨져 있었고, 갑옷이나 무기는 모두 없어진 상태였다. 슈마허는 침대에 누운 채 라스를 바라보고는 힘들게 웃으며 말했다.
"라스…각하. 각하와 감방 동기가 될 줄은 꿈에도…."
"말하지 말아요, 말하지 말아. 이런 큰 상처라니. 묻고 싶은 것이 많지만 일단은 좀 쉬도록 하오, 슈마허경."
"경…이 아닙니다."
"뭐요?"
"경이 아닙니다…저는 해적이 되었습니다."
라스는 이맛살을 찌푸린 채 슈마허를 바라보았지만 반문을 하거나 재촉하지 않았다. 슈마허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판자 건너기…아십니까?"
라스가 눈을 크게 떴다. 슈마허는 피식피식 웃으며 말했다.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해적이 되기로…해적 슈마허라고 불러주십시오."
"…이유를 말해보시오."
슈마허는 하얗게 웃었다.
"부하들…마음 편하게…."
잠시 기다리던 라스는 슈마허가 이미 실신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라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슈마허에게 시트를 덮어주고 의자에 앉았다.
판자 건너기라. 그런 것을 시켰단 말이지. 라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젊은 청년에겐 너무 가혹한 일이었겠군. 라스는 슈마허의 말에서 생략된 부분을 거의 정확하게 추측해낼 수 있었다. 부하들이 마음 편하게 변절하여, 그들 자신의 목숨을 보존할 수 있도록 저 스스로 먼저 변절했습니다.
골똘히 생각하던 라스는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그런데 왜 내게는 판자 건너기를 시키지 않은 거지? 아아, 그렇군. 라스의 얼굴이 밝아졌다. 해답이 곧장 떠올랐다.
몸값이군. 그렇다면 왕녀께서도 무사하실 가능성이 높군.
라이온의 거친 해적 선발이 호위대장 슈마허의 자발적인 변절에 도움을 받아 간단히 마무리되었을 때, 태양이 막 수평선을 넘어가고 있었다. 하늘은 부드러운 검붉은 색으로 물들어갔다.
그리고 판자 위에 서 있던 라이온은 벼락출세의 본보기가 되어 있었다. 비록 그 안에 실린 화물을 다 팔아치우는 순간 침몰시킬 배였지만, 어쨌든 라이온은 레보스호의 임시 선장이 된 것이다.
판자 끝에 선 채 석양을 바라보던 라이온은 고개를 들어 레보스호의 선장으로서의 업무를 시작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