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소설] 폴라리스 랩소디 (23)
기사입력 1999년 03월 26일 15시 00분
"착각이라구요?"
"당신은 나에게 자신을 제공할 필요가 없소. 당신을 기다리는 자는 따로 있으니."
왕녀는 순간 아직 결혼하지도 않은 미래의 남편 때문에 어깨가 으쓱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럼, 몸값을 받으실 건가요?"
"뭐요?"
왕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도 로네스씨…." 일단은 이렇게 불러야할 것이다.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은 남편이라고 부를 수 없으니까. "…에게 날 보내주시고 몸값을 받으시려는 것 아닌가요?"
키는 빙긋 웃었고, 율리아나 왕녀는 키의 그 웃음이 마음에 들었다. 키는 웃음을 머금은 얼굴을 바꾸지 않은 채 말했다.
"그런 것이 있을 지 의심스럽지만, 만일 필마온의 갈가마귀들에게 받을 것이 있다면 직접 검독수리의 관문을 열고 들어가 받아낼 거요."
율리아나 왕녀는 어이가 없는 얼굴로 말했다.
"검독수리의 관문을 열고 들어간다구요? 제국 역사상 지금까지 아무도 강제로 열 수 없었던 문을 마치 새장의 문 따위나 여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새장의 문을 열어본 적이 있소?"
"예?"
키는 책상머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왕녀의 무릎 바로 앞에 선 채로 왕녀를 내려다보았고, 왕녀는 팔걸이를 단단히 쥔 채 목을 꺾어 키를 올려다보았다.
"새장의 문을 한 번이라도 열어 보았소? 그래서 새로 하여금 그 메마른 날개에 자유의 공기를 적시도록 해보았느냐 말이오?"
너무 현학적인 말을 들은 율리아나 왕녀는 입을 조금 벌린 채 키의 어두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키는 갑자기 몸을 숙였다. 그리고 의자의 팔걸이를 짚으며 왕녀에게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댔다.
왕녀의 심장이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고동쳤지만 키는 여성스럽게 속삭였다.
"새장의 문을 여는 것이 그렇게 쉬운 거요? 그 새가 누려온 안락과 안전 대신 무자비한 자유를 주는 것이 과연 그 새에게 잘하는 일이오?"
"모르…, 몰라요. 하, 하지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어요."
"말해보시오."
얼굴 바로 앞에 키의 얼굴이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지만, 왕녀는 입술을 핥고 싶었다. 율리아나 왕녀는 힘들게 말했다.
"당신, 당신은 내게 질문하고 있지만, 대답을 바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요."
키의 눈에 묘한 빛이 지나갔다.
키는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책상을 돌아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율리아나 왕녀가 한숨을 내쉴 사이도 없이 키는 곧장 말했다.
"나가보시오."
왕녀는 떨떠름한 얼굴로 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키는 말을 마치자마자 의자를 뒤로 돌렸다. 왕녀는 일어나서 키의 등을 한번 바라본 다음 문으로 걸어갔다. 그 때 키가 등을 돌린 채 나즈막하게 말했다.
"문을 확 잡아당기시오."
왕녀는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키를 바라보았지만, 키는 여전히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총명한 왕녀는 곧 키의 말을 이해했고, 그래서 얼굴을 붉히며 문을 확 잡아당겼다.
"어이쿠！"
덕분에 선장실의 문에 귀를 바짝 가져다댄 채 키와 왕녀의 말을 엿듣고 있던 라이온과 몇몇 해적들이 선장실 안으로 일제히 나동그라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