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트소설] 태아 (1)
기사입력 1999년 03월 03일 15시 21분
희진이는 침대 위에 앉아서 발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칠한지 한참은 되었을 듯한 빨간 매니큐어가 그녀의 발톱 끝에서 벗겨져 가고 있었다.
희진의 발치에는 육중하게 생긴 남색의 일기장이 펼쳐져 있었다.
희진이는 일기장을 한줄씩 꼼꼼히 읽은 다음 부욱 찢어서 마구 구겨 침대 밑으로 던져버리는 동작을 반복했다.
그녀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1996.12.28. 날짜를 보자마자 희진은 읽지도 않고 일기장을 발기발기 찢어버렸다.
희진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마치 기는 듯한 헐떡거림과 함께….
눈에 핏발이 서고 머리 속에서는 마치 경고음 같은 귀울림과 함께 '떠올리지마！' `떠올리지마！' 하는 외침이 들려오고 있었다.
희진은 이를 악물었다. 조그만 입술이 하얀 이에 찝히더니 즉시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붉게 충혈된 눈에서 드디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희진은 악몽 같았던 그날을 기억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은 학교 보충이 끝나는 날이었다.
야간 자율학습까지 끝내고 보니 이미 밤 11시가 넘어있었다.
자율학습을 하는 날이면 언제나 집이 같은 쪽이던 미주와 돌아오곤 했지만 그날 미주는 어디로 샜는지 연락이 없었다.
집에 전화를 해도 학교에 갔다고 하는 것을 보니 아마도 교복차림으로 놀러 가버린 모양이었다.
토요일이었기 때문에 TV 생방송 쇼에 방청을 갔을지도 몰랐다. 언제나 외쳐 부르던 가수를 보기 위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희진이는 피식 웃어버렸다.
어두컴컴한 버스정류장에서 한참을 서 있는 동안에 미주 생각이라도 하면 덜 무서울 것 같아 희진이는 연방 미주가 갔을 곳을 추측해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집으로 가는 버스는 오지 않았고 주위에 서서 기다리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사라져 버렸다.
시간은 이미 12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희진이는 불안해졌다.
'왜 이러지. 집으로 가는 버스는 하나 밖엔 없지만 그래도 자주 오는 편인데….'
하는 수 없이 그녀는 집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걸어서 2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하지만 같이 다니던 미주도 없이 혼자 그 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영 꺼림칙했다.
코트 안의 교복치마 밑으로 차가운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얇은 스타킹 안의 살갗에 소름이 쫙 끼쳤다.
희진이는 최대한 목을 옴츠리고 걸음을 빠르게 했다.
골목으로 접어드는 길이 나타났다. 골목 끝쪽엔 아직 다 지어지지 않은 빌라가 방치되어 있었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공사는 멈추어졌고 이젠 불량아들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
희진은 코트 깃을 세우고 얼굴을 푹 파묻은 채로 종종걸음치듯 덜 지어진 빌라 옆을 지나쳐 갔다.
뻥 뚫린 빌라 벽들 사이에서 휘이잉 하고 바람이 새어 나오는 소리가 들리자 희진은 흠칫 놀라 걸음을 더 빠르게 했다.
[계속]
글·김문경
/하이텔 악몽따라&무진교(go sg90)
＜작가 소개＞
이화여대 4년. 아이디`밀랍인형'.
동화와 같은 경쾌한 글부터 조용한 전율이나 극단적인 사악함이 느껴지는 글 등 작품 세계가 무척 다양하다. 어둡고 끈적거리는 공포에 능숙해 `악녀'란 애칭을 갖고 있다.
대표작:`가위 눌림', `편식 시리즈'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