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청춘일기] 한석규(5)
기사입력 1998년 02월 11일 15시 44분
`아들과 딸'은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드라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극중 부드러운 페미니스트로서 석호의 이미지가 여성 시청자들에게 호감을 주었고, 마치 그 이미지가 내 실제 이미지인 양 알려진게 인기의 요인이 됐다.
난생 처음 CF모델 제의를 받은 것도 이때의 일이다.
내게도 광고모델 제의가 들어오다니. 감개가 무량했다.
처음 출연한 CF는 현대자동차 엑셀승용차의 광고모델. 광고출연료는 1천만원. 94년 당시 내 처지로서는 상당히 큰 액수였다.
어머니께 이 사실을 알리고 출연료를 갖다 드렸더니 "네가 탤런트가 되기는 된 모양이구나. 광고모델을 다하는 걸 보니"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도 내심 기뻐하시는 눈치였다.
연극한답시고 왔다갔다하더니만 실업자로 1년여 보내던 아들. 성우랍시고 방송국 드나들다가 요행히 탤런트가 됐나보다 했더니 죽 단역으로만 나오던 아들. 그 아들이 인기드라마에서 꽤 큰 배역도 맡고, 광고 모델까지 됐다니 대견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아들과 딸'의 인기여진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이번에는 `파일럿'이란 항공드라마에 캐스팅됐다. 이재룡 최수종과 함께 3총사로 등장하는 주조연급이었다.
이 드라마 역시 제법 인기를 끌었다. 특히 그해 항공대학 입시 경쟁률이 사상최고를 기록했을 정도로 젊은 층의 호응이 높았다.
`아들과 딸'이후 캐스팅운은 그야말로 술술 풀려갔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94년 가을 당시 MBC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하는 주말드라마 `서울의 달'의 주연급인 홍식역으로 캐스팅된 것이다.
산동네 서민들의 이야기를 그리는 이 드라마에서 홍식이란 인물은 시골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무작정 상경해 강남의 술집에서 대리운전을 하는 청년. 그러나 깡패에게 빌린 돈을 갚기 위해 막역한 고향친구인 춘섭(최민식)에게 사기치는 몹쓸 짓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다가 밑바닥 생활을 벗어나기 위해 춤을 배우고, 호시탐탐 돈많은 여자를 노리는 제비족이 된다.
`아들과 딸'의 석호와는 전혀 딴판의 인물이었다. 이 역할을 잘 해낼까 우려하는 주위의 시선들도 적지 않았다.
다행스러운 건 `서울의 달'의 배경이 되는 산동네, 재개발 지역이라든가 그속에 등장하는 서민들의 정서 등이 별로 낯설지 않다는 점이었다. 종암동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종암동에서 살면서 익숙하게 보아온 풍경들이기 때문이었다.
새끼 제비에게 `서울, 부산, 대전 찍고' 스텝을 열심히 배우며 제비족이 된 홍식이로 살았던 6개월. 분명히 `몹쓸 놈'의 캐릭터였는데, 시청자들은 이상하게도 홍식이를 연민의 눈빛으로 봐주었다. 대성공.
그때나 지금이나 팬들의 무한한 사랑에는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아무리 `고맙습니다'를 되뇌어도 그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는 부족할 뿐. 변함없이 관심과 성원을 보내주는 팬들이 내 존재의 이유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때문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지나고나서 되돌아보니 남들보다 늦게 출발한 것이 오히려 투철한 목적의식을 갖게 한 것 같다. 영화로 활동무대를 옮긴 뒤 `닥터 봉' `은행나무 침대' `초록물고기' `넘버 3' `접속' `8월의 크리스마스' 등에서 호평을 받게 된 것도 그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X끝〉
■다음호부터 `존재의 이유' `사랑을 위하여'로 성인가요 붐을 일으킨 가수 김종환편이 연재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