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크리스마스] 밝은 감성 넘쳐나는'시한부사랑'
기사입력 1998년 01월 21일 15시 02분
또 한편의 빼어난 멜로 영화를 만나게 됐다.
지난해 `접속'과 `편지'로 이어진 멜로의 정서가 신년에는 `8월의 크리스마스'(허진호감독－우노필름 제작)라는 아름다운 영화로 이어지게 됐다.
IMF 한파로 인한 답답한 일상도 `8월의 크리스마스'에 들어오면 잠깐동안이나마 시름을 잊을 수 있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남자와 그러한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는 20대의 생기 넘치는 여자의 사랑이라는 이야기 구조는 눈물흘리며 가슴 쥐어뜯는 슬픔으로 가득할 것 같지만 이상하리만치 `8월의 크리스마스'에는 밝고 따뜻한 감성이 넘쳐난다.
물론 아무리 따뜻하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라 하더라도 그 이면에는 아릿한 슬픔이 자리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8월의 크리스마스'는 그 슬픔의 실체를 좀체로 드러내지 않는다. 억지로 눈물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변두리에서 조그만 사진관을 운영하는 사진사 정원(한석규)은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있다. 너무나 무심해서 정말로 이 사람이 곧 죽을 사람인지 의심될 정도로 담담한 일상을 보내는 정원에게 어느날 주차단속요원인 다림(심은하)이 싱그럽게 다가온다.
처음엔 일상의 한 페이지로 시작됐던 다림의 존재가 점차 정원의 마음을 흔든다. 불현 듯 찾아온 사랑, 시작하기엔 남은 시간이 너무 짧다는 걸 아는 정원은 애써 태연을 가장한다.
언제나 따뜻하게 미소짓는 정원에게 풋풋한 사랑을 느끼는 다림도 `아저씨'라 부르며 차곡차곡 사랑의 감정을 키워간다.
둘에게 찾아온 사랑은 요즘식의 저돌형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전적인 `남몰래 흘리는 눈물'도 아니다. 그저 자신의 감정들에 충실할 뿐이다. 죽음을 눈앞에 두었다고 비극적이거나 이러한 사연을 모른다고 철없이 투정부리지도 않는다.
오히려 남아있는 삶에 대한 애정을 다감하게 그려내는데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역설적으로 허진호 감독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정원의 사랑과 그의 죽음을 모르는 다림의 사랑에 일정한 `거리'를 둔다.
한번도 사랑한다는 고백도 없이 영화는 끝난다. 자신이 직접 찍은 영정으로 정원의 죽음이 보여지고, 여름에 시작됐던 사랑은 어느덧 눈내리는 겨울로 접어든다.
굳게 닫힌 사진관 문틈으로 밀어넣은 다림의 편지와 죽기전 다림의 예쁜 사진을 사진관에 걸어둔 정원의 답장이 이들 사랑의 완성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딱 한번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단 말을 남깁니다"라는 정원의 내레이션으로 참고 참았던 슬픔을 드러낼 뿐이다. 신인 감독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은 도의 경지에 이른 `절제의 미학'이다.
얼마전 타계한 고 유영길 촬영감독의 차분하면서도 세밀한, 정적이면서도 심도 깊은 카메라는 이러한 허 감독의 의중을 완벽한 영상 언어로 표출했다. (24일．피카디리 극장)
[이창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