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검무정] <제19화> 대륙의 기인들(12) ♣
기사입력 1996년 08월 27일 15시 02분
이소야. 그 이름을 기억하고 얼굴을 떠올리면 그리움이 솟는다. 그는 무심하고 다정하지 않지만 어느 누구 보다도 고독하다. 그는 때로 자신을 학대하기도 한다. 그의 고통은 사실 여자의 음모(陰謀)로부터 시작 됐고 그 음모는 여전히 진행중이다. 여인들의 잔인함이란 얼마나 지독한 흉기(凶器)인가. 그 흉기에 상처입지 않은 사내들은 흔치 않다. 이효봉-이 노인 역시 절망적인 상처를 안고있다. 하지만 이효봉은 말이 없었다.
그는 오랫동안 무현왕자를 보필해온 충직한 하인마냥 행동했다. 마치 수족 처럼 움직이는 동방산장의 장주. 그의 침묵은 왕녀 아비라와 헤어져 심양으로 돌아오는 지난 닷새간이나 계속 되었다. 무현왕자 역시도 우울한 기분이 되어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그의 상처도 심상치 않은 것이다. 이들이 심양을 목전에 두고 밤길을 재촉하고 있을 때 맞은편에서 마차 한 대가 등장했다. 까맣게 윤이 흐르는 마차는 온통 검은색이었다. 마차의 휘장은 물론이고 장식과 말까지도 검정이었다. 이경(二更)이 넘은 시각에 호젓한 산길에서 마주친 흑마차는 음산한 기분이 들게 했다. 이효봉이 무현왕자를 은연중에 보호하며 앞으로 말을 몰아 나갔다.
"심야에 말을 재촉하는걸 보니 당신들도 꽤나 바쁜 모양이군."
마차안에서 새어나온 음성은 억양이 분명치 않았다. 이효봉은 상관하지 않고 지나쳤다. 이번에는 다른 목소리. "늙은이의 기도(氣道)가 제법이야."
동방산장의 장주에게 절대 이런 말투는 무사하지 못하다. 그러나 이효봉은 상대하지 않을 심산이다. 그는 단지 무현에게 서두르라는 손짓을 보냈다.
팟 하는 음향과 더불어 흑마차로부터 칼집이 삐져 나왔다. 무현왕자의 길을 가로 막는 것이다. 무현왕자는 위엄어린 질타를 내윽었다.
"시비를 걸자는 것이오?"
여전히 음산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달빛이 고와 피를 보기에도 좋은 날이야. 이런 날을 그냥 넘어가게 되면 참으로 아쉬워." 무현왕자의 시선이 저절로 이효봉에게 향했다. 이장주는 침착한 얼굴이었지만 내심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심양은 물론이고 중원에서도 보기 어려운 마차다. 심상치 않은 내력을 소유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어쩌면 무현왕자님을 노리고 왔을지도.' 마차의 문이 열리며 두 명의 괴인(怪人)들이 흑의 피풍(皮風)을 휘날리며 유령 처럼 내려섰다. "환류검(幻流劍)."
"잔인마도(殘忍魔刀)."
그들의 별호였다. 각기 두 자루의 검과 도를 착용하고 있는 그들은 생김새 역시도 귀기스러웠다. 달빛도 순식간에 공포에 사로 잡히고 있는 듯한 심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