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형 옴니버스소설] LOVE LOVE LOVE(61)
기사입력 1996년 08월 06일 15시 20분
**방송국은 울지 않는다(11)
윤지희가 문제다. 뭐 거짓말을 할 생각도 없고 나쁜 일도 아니지만 그녀의 의견을 물어보지 않고는 기자에게 털어놓을 일이 아니다.
신문사의 저 기자친구, 벌써 윤지희에게 물어보고 왔는지 모른다.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시치미를 뗐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냥 같은 동네 살았다는 정도로 넘어갔을 지도 모른다.
그걸 모르고 내가 첫사랑 어쩌고 저쩌고 한다면, 자살골도 그런 자살 골이 없잖은가. 지금하는 드라마 `와일드'에도 타격이 될수 있다.
숨막히는 몇분이었다. 현표는 국장실에 들어가서 전화 중인 국장에게 전화 오래 하실거냐고 물었다.
"뭐야, 국제전화 쓸거야?"
국장석, 부장석 전화가 아니면 다이렉트로 국제전화는 안된다. 현표는 그게
아니라고 얼굴을 찡그리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잘나가는 PD가 우거지상에다 잔뜩 찌푸려 가지고…."
국장석은 칸막이라 저쪽 기자쪽에선 보이진 않지만 보통 대화소리는 들리는
거리다. 현표는 얼른 책상 시험지 위에다 색연필을 집어들어 써갈겼다.
`SOS, 도와주십쇼' 그리곤 손가락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밖에 기자를 피해
나가야 돼요.' 그제서야 국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치챘다. 그리곤 거짓말로
결재서류이야기를 꺼냈다.
"이거 결재 좀 해주세요. 그리고 자료 좀 보고 싶은 거 있는데요. 지난번
`사랑이 들린다' 할 때 제작비 쓴 것 좀 볼 수 있습니까?"
목소리는 같은 톤을 유지해야 한다. 바깥의 기자는 어쩜 귀를 빼내어 이쪽에
바짝 신경을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국장은 제자리에 앉은 채 책들을 쿵쿵
때려대고 자료 찾는 소리를 울려댔다. 여기 있었는데…해가면서 괜히 자료정리 못한다고 여직원을 추궁해댔다.
"그런 파일들은 탁, 보이는 자리에 놔둬야지…."
국장이 그렇게 보조를 맞추는 동안 현표는 시험지에 잽싸게 또 적어댔다.
`저 좀 데리고 제작국에서 나가주세요.'
그걸 읽은 국장은 괜히 공책을 몇번씩 펼치는 소리를 내다가 방법을 내렸다.
"정 PD, 근데 이거 뭐야. 나 이거 혼자 결재 못하겠는데 누가 이런 식으로 기획안 잡았어, 본부장하고 먼저 말을 해야 돼 이런 건."
괜히 약간 화난 듯한 음성이 섞인 급조된 쇼. 역시 명 연기자들을 수없이 상대했던 명 PD출신답다. 현표 따윈 발가락도 따라갈수 없는 노련함이 있다. 국장은 AD시절부터 현표를 싸고 돌며 키웠다. 국장 역시 귀신잡는 해병 출신이었던 것이다.
현표는 국장을 따라 제작국을 나왔다. 자기자리에 죽치고 있는 기자에겐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잠깐, 본부장님 좀 뵙고 올게요. 여기 계세요."
국장은 화장실로 들어가며 손을 흔든다. 현표는 잽싸게 비상구 계단을 뛰어 올랐다. 그리곤 한층 위 교양제작국 구석진 자리에 앉아 전화를 들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윤지희에게 거는 전화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