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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 법만 스님 '힘든 세상, 행복하게 사는법' 포교

김용표 기자

기사입력 2014-05-29 14:05 | 최종수정 2014-06-05 13:28


지역 사회와 함께 호홉하는 '천년고찰 선운사'

선운산 북쪽 기슭자락에 자리해 대한불교 조계종의 24교구 본사인 선운사는 577년 검단선사(黔丹禪師)에 의해 창건됐다고 한다. 선운(禪雲)이란 불교의 참선수도를 뜻하는 참선와운(參禪臥雲)에서 유래한 것으로 조선조 억불정책으로 사찰 폐쇄령을 내렸을 때도 국태민안(國泰民安)의 사찰로 선운사는 건재했었다. 그후 성종 때는 국가의 복을 기원하는 어실(御室)을 모신 자복사(資福寺)로 승승장구했다.

현재 도솔암, 참당암, 석상암, 동운암이 있지만 한때 89개의 암자를 거느리며 고려시대에는 호남 제1의 사찰이었으며 금산사와 더불어 전라북도내 조계종의 2대 본사인 선운사에는 보물 5점, 천연기념물 3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9점,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2점 등 총19점이 있는 문화재 박물관 수준의 사찰이다.

대웅전(보물 제290호), 만세루(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53호), 영산전, 명부전, 산신각, 천왕문, 대방(大房), 요사(寮舍), 금동보살좌상(보물 제279호), 금동지장보살좌상(보물 제280호), 동불암마애불상(보물 제1200호), 영산전목조삼존불상(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8호), 석탑(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9호), 범종(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1호), 중종과 부도 및 탑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2호)가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이밖에 다수의 조상(彫像)과 사적비 등이 남아 있다.

또한 절 주위에는 진흥왕이 수도했다는 진흥굴, 검단선사에게 쫓긴 이무기가 바위를 뚫고 나갔다는 용문굴(龍門窟), 전망이 뛰어난 만월대(滿月臺) 등의 명소가 있어 365일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특히 대웅전 뒤에는 5천여평의 산비탈에 수령 약 500년, 높이 평균 6m 되는 동백나무 3천여 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어 천연기념물 제 184호로 지정되어 해마다 이 무렵이면 '동백연' 축제가 열린다.

넘처나는 법만 스님의 '지역 사랑과 보은염'

선운사는 창건 당시부터 대중 구제였다. 처음 선운사를 지을 무렵 이 지역엔 농토가 없어 도적들이 많았다. 도둑질을 할 수 밖에 없는 무리들에게 검단선사는 소금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게 된 도적들은 이후 봄과 가을이면 소금으로 스님의 은혜에 보답했다. 이게 보은염(報恩鹽)이다.

이후 후손들은 1500여년간 소금 굽는 전통을 계승해 왔으며, 이로 인해 보은염은 고창지역의 대표적인 특산물로 자리매김을 해 왔다. 그러나 보은염은 일반 소금에 비해 고가인데다 홍보부족 등으로 판로에 어려움을 겪어 왔다.


지금의 법만 스님이 주지로 부임한 이후 선운사는 지역사회를 위해 문을 활짝 열고 대중들과 함께하는 사찰운영을 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검단선사가 펼친 대중구제를 이어가는 것이고 그 일환으로 기획한 것이 바로 <보은염>이다.

보은염은 선운사 인근에서 생산되는 천일염과 자염 등을 사들여 <선운사 브랜드>로 판매해 지역민들의 살림에 보태고 있다. 아울러 생산자를 돕고, 이 수익으로 어린이집과 양로원, 원로스님 복지시설 등을 설립했거나 운영하고 있다.

법만스님은 주지 취임 이후 지역을 위해 가장 먼저 문을 열은 것이 <만세루> 개방이었다. 선운사 한복판에 자리하며 그동안 먼지로 가득한 창고로 사용되어 오면서 방치되어 왔던 만세루를 새단장하여 10개가 넘는 차상에 주민들과 관광객들이 앉아 언제든 차를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스님의 사찰개방에는 지역주민들과의 소통도 중요한 것중 하나다. 이를 위해 주변 마을의 이장단과 부녀회, 청년회 등과도 정기적인 만남을 통해 서로 협력하고 있으며, 또한 주민들과 함께 문화유적지를 탐방하며 우리 문화역사를 일깨워 주고 있다. 특히 노령인구가 많은 농촌현실을 감안해 전북지역 최대 규모의 복지시설인 '고창종합사회복지관' 등 4개 복지시설을 운영하며 이와함께 동국대 병원과 함께 고창 지역에서 무료 의료봉사 서비스도 하고 있다.

또한 부처님오신날이나 선운문화제 등의 행사에는 꼭 지역민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마련하고 지역의 의미 있는 행사에는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흥덕중학교 밤샘독서 행사를 전액 지원한 것도, 대중과 좀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산사음악회>도 모두 '절이 세상 밖으로 나가기 위해' 펼치는 법만스님의 대중 구제였다.

더욱 주목할 점은 법만스님의 구상은 지역과 선운사를 하나로 묶어 <지역의 문화관광 허브>로 만든다는 것이다. 선운사는 미당 서정주 등을 길러낸 석전 박한영 스님의 본사다. <미당시문학관>을 연간 100만 명이 넘게 찾는 선운사와 하나로 묶어 문화 허브로 만들어 지역 발전을 꽤한다는 것이 법만스님의 구상이다. 그중의 하나로 매년 선운사에서 개최하는 선운문화제는 '선운사의 역사와 문학'을 알리고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노후수행마을 건립…수행과 포교에만 전념

스님들은 젊어서는 포교와 수행활동을 왕성하게 하지만 정작 노후 대책은 별로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법만스님은 스님들이 수행과 포교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후수행마을>을 건립, 스님들의 노후를 보장해주고 있다.

선운사 인근 석상마을부지 약 3000여평을 매입해 작은 집 여러채를 지어 한 채당 2-3명씩, 총 50여 명 정도의 스님이 지내도록 하는 불사다.

65세 이상의 스님이 입주하는 노후수행마을에는 텃밭과 야생 녹차밭이 있어 '반농반선'이 가능하며 '수행 연금' 명목으로 소정의 용돈도 지급하고 원로스님들이 텃밭과 차밭을 돌보며 안정적인 노후를 지낼 수 있도록 도울 방침이다.

그동안 조계종단에서 승려노후복지에 대한 여러 논의가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사실상 선운사가 처음이다.

한국불교의 초석을 다진 석전과 한암스님 사상 조명

법만 스님은 월정사 정념 스님과 함께 문도회를 중심으로 석전과 한암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사업에 힘을 쏟고 있다. 석전과 한암의 법맥을 잇는 사찰인 선운사와 월정사는 지난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한국불교학회와 공동으로 학술대회를 열어 석전·한암 스님의 사상을 집중 조명하는 자리를 가진 바 있다.

석전(石顚·1870∼1948) 스님과 한암(漢岩·1876∼1951) 스님은 한국불교의 초석을 다진 이들이다. 한암 스님은 당시 최고의 선사로 윤리적 바탕 위에서 선 수행으로 평생을 살았던 선종의 대표 주자였고, 석전은 '박한영'이란 속명으로 알려져 경전과 교리를 중시하는 최고의 석학이자 교학의 대종사였다.

계율과 윤리를 중요하게 여기며 선·교 양종에서 가장 출중한 인물이었던 이들은 일본불교의 대처와 육식 관행을 보급하려는 일제에 강력히 저항했다. 오늘날 조계종이 비구승가로 남게 된 데는 석전과 한암의 기여가 결정적이었다.

특히 조선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석전은 불교뿐 아니라 각계에 많은 제자를 남겼다. 대표적인 이들이 청담·운허·운성·운기·남곡 스님과 육당 최남선, 위당 정인보, 미당 서정주, 이광수, 신석정 등이었다.

육당 최남선은 그를 두고 "석전 스승은 모르는 게 없을 만큼 박식했다"고 했고, 정인보도 "한영(석전의 속명)과 함께 길을 가면 어디를 가도 모르는 것이 없다"고 감탄했다.

한암 스님은 1925년 "천고에 자취를 감추는 학이 될지언정 봄날에 말 잘하는 앵무새 재주는 배우지 않겠다"며 강남 봉은사 조실 자리를 박차고 나와 오대산으로 들어갔다. 이후 계율정신을 강조한 승가오칙을 몸소 실천해 입적할 때까지 27년간 거의 산문을 나서지 않았다.

석전 스님의 법맥은 남곡-태허를 거쳐 선운사 주지 법만 스님으로 연결되고, 한암 스님은 탄허-만화를 거쳐 월정사 주지 정념 스님으로 이어진다.

법만 스님은 "이런 역사와 수행가풍이 살아 있는 강학과 수선의 도량 선운사는 앞으로 기도와 수행, 교육의 힘을 바탕으로 사부대중과 함께 복지와 문화, 수행공동체를 이루고자 한다"고 말했다.

법만 스님은...

법만 스님은 종단 안팎의 주목을 받고 있다. 출가 이래 줄곧 선방에만 있던 수좌 출신으로 기울어져 가던 교구본사에 변화와 혁신의 바람을 불어넣으며 '절이 이렇게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있는 스님이다.

법만 스님은 세상과 가까이 하고 세상속에서 부처님의 참다운 자비를 보여주기 위한 원력으로 고창읍에 <불교회관>을 세웠다. 여기에는 어린이집과 지역아동센터, 청소년에 이르기까지 교육, 복지, 문화, 체험, 수련 등이 모두 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종합타운이다.

"제 자신의 삶에 보다 충실하고 그러면서 대중과 호흡하며 그들을 부처님 법으로 인도하여 힘든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알려주어 '복福 지어 회향하는 삶'을 꿈꿉니다"

사실 법만 스님은 선운사에서 출가해 30년 이상을 선운사에서 지냈다. 그러니 누구보다 선운사를 잘 알고 있다. 지금의 변화 역시 여기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법만스님은 1980년도에 전북대학교 사범대학 3학년때 남곡스님 큰스님의 법문을 듣던중 크게 발심하여 선운사로 입산 출가. 1982년 범어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태허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1986년 역시 자운스님을 계사로 태허스님을 은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현재 선운사불학승가대학원 설립추진위원장, 고창종합복지관 운영위원장을 비롯하여 미당 서정주문학관 이사장, (전북)남북청소년지킴이 추진위원장, 불교무설연구소장, 백파사상연구소 이사장 등 수행과 강학의 도량 선운사와 불법 헌양은 물론 사회의 어두운 곳에 등불을 밝히고 우리문화 보급을 위해 정진하고 있다.

취임이후 지금까지 늘 초심(初心)을 잃지 않고 있는 법만 스님은 처음 주지에 취임하면서 부처님의 정법이 살아 숨 쉬는 수행과 교화도량으로 선운사를 가꾸겠다는 포부를 밝혀왔다. "이를 위해 <수련법회 실시> <불교교양대학 설립> <지역민과 교류확대> <스님들의 노후복지 대책 수립> 등의 공약이 점차 실현되어가며 불국토를 이루고 '사대부중과 함께하는 수행공동체'로 거듭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글로벌경제팀 award@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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