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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뜨거운 여름밤, 대한민국 여자축구를 대표하는 에이스 3명을 한자리에 불러모았다. 첼시 레이디스 4년차인 '지메시' 지소연(27)은 시즌 후 한국에서 꿀맛 휴가를 즐겼다. 매주 WK리그 현장을 찾아가 동료 선후배들을 응원했다. '윤덕여호의 캡틴' 조소현(29·현대제철)은 지난해 일본 고베 아이낙에서 활약했다. '테크니션' 전가을(29·현대제철)은 지난해 한국 최초로 미국 여자축구 리그에 진출, 뉴욕 플래시에서 뛰었다. 4일 런던으로 출국하는 지소연은 휴가 내내 조소현, 전가을과 함께 현대제철 여자축구단에서 훈련했다. 미국-일본-잉글랜드 리그를 경험해본 대표팀 에이스들과 한국 여자축구의 과거, 현재, 미래를 이야기했다. 깔깔 웃다가, 세상없이 진지하다가, 목이 메어 울컥하다가… 그렇게 2시간이 넘는 '축구 수다'는 밤 깊도록 이어졌다. 지난 10년간 대한민국 여자축구를 '하드캐리'해온 황금세대 에이스들의 속깊은 대화를 지상중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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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연] 평양 안 가보셨죠? (이)은미언니는 유서를 쓰고 갔대요. 혹시 못돌아올까봐.(웃음)
[가을] 맞아맞아. 은미가 태블릿을 가져갔잖아. 유서처럼 일기를 매일 썼더라고. 1일째, 2일째….
[소연] 숙소인 양강도호텔에서 아무데도 못갔다. 공항에서 버스 타고 평양 거리로 나왔는데 완전 옛날 엄마 앨범, 80년대 스타일… '남측'에 태어난 게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운동장, 호텔, 좋은 곳만 보긴 했는데, 그래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을언니는 방에서 맨날 TV만 보고….
[가을]이때가 아니면 언제 보나 하는 생각에…. '향심이'었나. 시민영웅 이야기였는데 재미있었다. 마지막 장면은 장군님 사진을 보면서 우는….
[소연] 무엇보다 그날 경기는 정말 평생 잊지 못할 것같다. 5만 관중 앞에서 뛴 건 처음이었다. "한국, 이기고 나가자!" 하니까 옆에 북한 선수가 "죽이고 나가자" 하더라. 지지 않고 "우리도 같이 죽여!"했더니 저들도 "죽이자!"하고. (유)영아언니가 이게 뭐라고 죽이기까지 하냐고… 그러면서 웃음이 터졌다. 긴장이 풀렸다.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고 들어간 게 좋았다.
[소현] 북한은 어린 선수들이 많아서 긴장을 많이 했다. 초반 터널 기싸움을 하면서 '지지는 않겠구나' 생각했다. 북한 주장이랑 악수하는데 긴장을 많이했더라. 얘네도 부담이 크겠다 생각했다.
[소연]나는 그날 우리 동점골 장면이 너무 소름끼쳤다. (장)슬기 골이 들어가자, 북한 관중 5만명이 순간 조용~했다. 우리 숨소리만 들렸다.
[가을] 동점골 넣고 그라운드에 쓰러진 (장)슬기를 누르면서 '누워 있어' '(시간) 끌어끌어' 했던 기억이 난다.
[소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우리 경기력이 정말 좋았다. 북한과 비기면 절반은 된 거라 생각했다.
[소연] 진짜 전쟁이었다. 한 선수는 입 주변이 찢어졌는데 그냥 테이프로 붙이고 뛰더라. 눈에 살기가 등등했다. 소름 끼쳤다.
[가을] 우리가 더 간절했다. 북한 선수들도 어린 나이에 부담이 됐고, 우리는 마음을 비운 상태에서 더 간절했다.
[소연] 맞다. 정말 간절했다. 프랑스월드컵에 못나가면 몇 년간 여자축구의 미래가 없으니까… 평양에 온 선수, 오지 않은 선수 모두 한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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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가 경험한 잉글랜드, 미국, 일본리그 이야기를 이어갔다. 당찬 선수들은 WK리그와 다른 환경속에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후배들에게 거침없는 도전을 권했다. "실패하고 깨지더라도 도전하는 것,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조언했다.
[가을] 미국리그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벅차다. 자부심이 대단하다. 올란도는 관중 4만 명을 찍었다. 꼬맹이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온다. 관중석에서 '디제잉'도 한다. 축제다. 홈 이벤트, 볼거리가 많으니 팬들이 찾아올 수밖에 없다.
[소현] 일본 리그도 팬들이 많은 게 제일 기억에 남는다. 팬들이 많으면 선수들이 더 발전하려고 노력한다. 팬들의 함성을 들으면 힘이 절로 난다. 첫 경기때 1만6000명쯤 왔다.
[소연] 3년간 일본 고베 아이낙에 있었고 잉글랜드 첼시에서 4년째다. 처음 첼시 갔을 때는 정말 실망했다. 일주일에 3번 운동하고,선수들은 죄다 '투잡'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엄청 발전하고 있다. 리그가 변화하고 함께 성장하는 것이 즐겁다. 남자 6부리그 구장 빌려 썼는데, 1만명이 수용가능한 첼시 레이디스 전용구장과 클럽하우스도 생겼다. 9월부터 리그가 시작된다. 샐러리캡(연봉상한제)도 없어졌다. 열심히 하는 만큼 벌 수 있다. 우리나라도 연봉상한제가 없어져야 한다. 3년차와 10년차가 같은 연봉을 받는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선수들에게 동기부여가 안된다. 잉글랜드는 여자축구도 당연히 티켓을 판매한다. WK리그도 유료화해야 한다. 유료라도 올 사람은 반드시 온다.
[가을] 미국에 있을 때 소연이와 연락을 자주 했다. 아플 때도 전화했고….
[소연] 외국인노동자의 마음을 서로 이해한다. 아프면 서럽다. 말도 안통하지, 친구도 없지, 힘들다. '6개월 지나면 괜찮아져요' 했다.
[소현] 소연이는 혼자서 어딜 가나 적응을 너무 잘했다. 독하고 강하다.
[소연] 7년째인데 견딜 수 있는 만큼의 고통이다. 잉글랜드에 처음 가서는 나도 울었다. 말도 안통하고 친구도 없고, 그런데 하다 보면 성숙해진다.
[소현] 우리 후배들이 계속 도전했으면 좋겠다. 힘들면 동료와 같이 가도 된다. 우리팀 비야-따이스처럼 서로 의지하면서.
[소연] 어디든 무조건 가야 한다. 나를 위해서뿐 아니라 한국에 좋은 선수들이 있다는 것을 세계 무대에 알려야 한다. 나도 앞으로 나라를 옮겨다니면서 더 열심히 도전하고 싶다.
[가을] 잘하면 인정해준다. 결국은 실력으로 승부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여자나이 서른, 쉽지 않다. 외국은 나이를 묻지 않는다. 오로지 실력이다. 서른여섯에도 풀타임을 뛴다.
[소연] 리버풀에도 42살 아이엄마가 엄청 잘 뛴다. 그런 모습을 보면 반성하게 된다. WSL에는 출산 휴가도 있다. 아기 백일이라고 휴가도 간다. 출산하고 1년 쉬고 또 몸 만들어서 온다. 우리팀엔 서른다섯에, 애 셋인 언니도 있다. 애들이 엄마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에 응원 온다. 너무 보기 좋다.
인천=전영지 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