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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이 꼴찌인데 인터뷰해도 되나 모르겠네요."
시종일관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김 감독의 목소리에서는 씁쓸함이 느껴졌다. 언제나 꽃길만 걸을 것 같았던 '스타 김세진'이 경험하고 있는 밑바닥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김 감독은 "비판 댓글, 악플들을 많이 봤다. 충분히 그런 말 들을 만한 상황"이라고 인정했다. 담담하게 반성했지만 그 역시 한 명의 '인간'이었다. "내색하려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솔직히 정말 힘들죠."
스타 꼬리표를 뗀 '인간 김세진'과 마주했다. "아! 이럴 때 소주 한 잔 하면서 이야기 하면 딱 좋은데…." 영락없는 키 큰 동네 형님의 모습이었다.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연다. "어디부터 이야기를 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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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옥천 출생 김 감독은 태생적으로 몸이 약했다. "어렸을 땐 체격도 작고 힘도 약했다. 심지어 학교 종례 시간에 운동장에 서있다가 현기증으로 쓰러지기도 했다." 하지만 운동능력은 있었다. 김 감독은 초등학교 3학년 때 선생님의 권유로 육상부를 했다. 종목은 높이뛰기. 그러나 금세 배구로 전공이 바뀌었다. 역시 선생님의 권유가 있었다.
배구부 생활은 험난했다. 열살 소년에겐 가혹하리만큼 거칠었다. 김 감독은 "맞기도 많이 맞았다. 도망칠까 생각도 했지만 잡히면 죽을까 겁나서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냥 그렇게 버텼다"고 했다.
보다 못한 부모님이 만류를 했다. 하지만 그만두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힘들고 무섭지만 공부하는 것보단 뛰는 게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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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약했던 소년은 무섭게 성장했다. 김 감독은 1992년 18세의 나이로 대표팀에 승선했다. 최연소였다. 2년 뒤엔 월드리그 최우수 공격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히로시마아시안게임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김 감독은 "그 땐 두려울 게 없었다. 그래도 엄청난 선배들과 경쟁을 하는 게 부담되고 걱정되기도 했던 건 사실"이라면서도 "코트 위에선 모두 동등하다. 어린 나이라고 무시받지 않기 위해 누구보다 이를 악물고 했다"고 회고했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신경전도 피하지 않았다. 김 감독은 "코트에서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많이 펼쳐진다. 특히 어린 선수들 기를 죽이기 압박도 있다"면서 "쫄지 않고 내 기량을 펼치려 노력했다. 나중엔 오히려 내가 신경전을 걸며 선수를 친 적도 있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마냥 탄탄대로만 걸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최정상을 빼앗기지 않으려 정말 아등바등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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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감독이 배구공을 잡은 지 30년이 훌쩍 넘었다. "내 나이도 벌써 마흔이 넘었다." 잠시 생각을 하던 김 감독은 "많은 게 변했다. 그런데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며 회한에 잠겼다. "누가 뭐라 해도 난 늘 최고를 향해 노력했다. 감독이 돼서도 챔피언결정전 우승도 연속으로 했다. 그래서 내 방식이 무조건 정답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최고 스타 출신 김 감독은 신생팀 OK저축은행을 이끌고 지난 시즌까지 두 시즌 연속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했다. "오히려 이게 독이었다. 배구도 그렇고 모든 일은 결국 사람이 한다. 성공을 위한 공식은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난 성공에 이르는 답이 있다고 생각해 왔다." 처음 느껴보는 생소함. 그는 지금 이순간도 배운다. "최근 어려움을 겪으면서 절실히 느낀다. 그래서 생각했다. 될 건 어떻게든 되고, 안 될 일은 무슨 수를 써도 안 된다."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난 지금까지 자신감 하나로 버티고 살아온 사람이다. 앞으로도 나를 지탱할 원동력은 자신감일 것이다."
마지막 한 마디가 울림을 던진다. "선수일 땐 나 혼자 힘들면 됐어요. 이젠 한 팀의 감독이에요. 내가 위축되고 힘든 내색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우리 애들 기죽을 거 아닙니까. 곧 죽어도 프로는 자존심, 자신감입니다. 앞으로도 변함없습니다."
임정택 기자 lim1st@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