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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의 기적', 끝내 이뤄지진 않았지만…

김준석 기자

기사입력 2014-08-14 09:12



터벅터벅 들어선다. 인터뷰실 가득한 취재진을 본 뒤 "어휴"하며 심호흡을 한 번 한다. 마이크가 영 어색한지 몇 번을 고쳐 앉으며 질문에 응한다. 이내 평상심을 찾은 그가 아쉬움을 곱씹는다. "제 생각을 말하면 되나요?"라고 되묻더니 본인의 철학을 담담히 풀어낸다. 때로는 듣기 편안한 느긋한 톤으로, 때로는 귀에 쏙 박히는 강단 있는 어조로 말이다.

지난해 U리그(대학리그)를 평정한 영남대는 올 시즌 9전 전승으로 9권역(경북·대구·울산)을 장악했다. 32골을 퍼붓는 동안 허용한 실점은 단 2골. 기세는 FA컵에서도 이어졌다. 32강전에서 아주대를 잡더니 16강전에서는 대전코레일(내셔널리그·3부리그)까지 꺾었다. 한 번만 더 이기면 대학팀 최초 4강 진출이란 역사를 쓸 수 있었다(1999년 동국대·2006년 호남대 8강 진출). 하지만 기적은 없었다. 13일 저녁 성남 탄천종합운동장에서 열린 2014 하나은행 FA컵 8강전, 영남대는 성남에 2-1로 패했다.


지난 7월, 강원도 태백에는 불이 붙었다. 불씨를 지핀 건 제45회 전국추계대학축구연맹전. 67개의 대학교가 모인 이 대회는 이슈에 오른 팀을 두루 살필 절호의 기회였다. 지역별로 권역을 나눈 U리그 성격상 전국의 모든 대학팀을 항시 살피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국가대표 출신 감독의 지략 대결, 입소문을 탄 특급 유망주 등 이야기보따리를 풍성하게 꾸린 '7월의 태백'은 더없이 귀했다. 미디어 관계자는 물론이요, 국내외 프로팀 스카우트까지 한데 모여 만남의 장을 이룬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남대도 그중 하나였다. 김병수 감독의 지도력과 학교 측의 투자가 맞물린 성과는 전국으로 퍼졌다. 최근 들어 더욱 자자해진 건 프로팀 포항에서 데뷔한 신인들의 활약 때문. 포항제철고(포항 U-18팀) 출신 이명주, 김승대, 손준호가 연이어 K리그클래식 무대를 주름잡자, 이들이 거쳐간 대학교에도 조명이 닿았다. 태백 고원1·2·3 구장, 강원관광대학교 구장, 황지중학교 구장, O2리조트 구장 등지에서 열린 추계대학축구연맹전에서 영남대 경기가 열리는 곳마다 구름 관중이 몰린 건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운동장에 들어선 이들은 '하나의 축구 철학'을 공유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턴 동작, 위치 선점, 퍼스트 터치 등 개개인의 능력이 좋기도 했거니와 전 포지션에 걸쳐 빠르게 침투하고, 돌아서고, 커버하며 원팀의 힘을 냈다. 볼 돌리는 속도를 높여 상대의 수비 전환 과정을 앞질렀고, 최전방-최후방 간격을 바짝 좁혀 상대를 2~3m 안에 가둔 채 압박했다. 16강 경희대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가까스로 살아남았고, 4강 인천대전에서 패하며 결승 문턱에서 좌절했지만, 손에 꼽을 만큼 좋은 팀임은 분명했다.


그래도 대학팀이었다. 이상윤 성남 감독대행은 지난 9일 전북전을 앞둔 자리에서 "프로와 아마추어는 엄연히 다르다"고 잘라 말했다. '대학'에서 날고 긴다는 선수가 선발된 곳이 '프로'팀 아닌가. 득점왕, 도움왕 등 학창시절 휩쓴 개인상 면면만 해도 그렇게 화려할 수가 없다. 힘, 체력, 스피드에서 드러나는 차이는 단순히 전술-전략, 정신력 및 조직력으로는 극복하기 힘들 정도. 냉정히 말해 대학 선수들은 프로행 앞에서 취업난을 고민하는 '학생'이었다. 김 감독 역시 이를 인정했다. "이제 걸음마를 뗀 수준인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게 사실"이라며 성남을 치켜세웠다.?

상대의 발 빠른 측면 자원에 생각이 깊어졌다. '쓰리백', '포백' 중 어떤 시스템으로 나서느냐를 두고 경기 전날 밤늦게까지 머리를 싸맸다. 고심 끝에 택한 건 태백에서 활용한 포백 대신, 5일간 급조한 쓰리백. 전반전을 무실점으로 막고, 후반에 승부수를 던지는 데 무게를 실었다. 그런데 뚜껑을 열자, 예상보다 혹독한 경기 내용이 나왔다. 주눅 들고, 당황한 탓이 컸다. 공간이 충분히 있음에도 조급했고, 위험 진영에서의 실수가 이어졌으며, 빠르게 치고 나갈 타이밍에 키핑 실수가 따랐다. 김 감독이 테크니컬 라인에 바짝 붙어 열정적으로 지시했으나, 상대 페널티박스로 접근하기조차 힘든 게 현실이었다. ?

전반 22분, 선제골을 내줬다. 김동섭의 헤더 뒤 세컨볼 싸움에서 패한 것이 화근이었다. 볼이 이창훈의 왼발 발등에 걸리기까지 수비수가 버텨주지 못한 게 내심 아쉬웠다. 확실히 등을 지거나, 그전에 먼저 처리하는 게 더 좋았을 장면이었다. 전반 중반이후 흐름을 잡기도 했으나, 미리 시야를 확보하지 못해 상대와 충돌하는 등 어려운 플레이를 했다. 후방에서 볼을 짧게 연결하는 특유의 플레이까지 막히며 공격 전환에 애를 많이 먹었다. 슈팅 시도 1회에 그친 동안, 얻어맞은 건 무려 10개. 전반전을 무실점으로 버티려던 김 감독의 수도 함께 꼬였다.



결국 후반 들어 다시 포백으로 갈아탔다. 수비 자원 대신 측면 자원을 투입해 이청웅-손민재-김종혁-정광채의 수비진을 구성하고, 류재문-김기만(박지홍)을 받친 뒤 나머지 공격진을 얹는 형태였다. 5백으로 내려앉아 측면 앞공간을 내주기보다는, 뒷공간을 감수하면서라도 조금 더 앞에서 싸우겠다는 심산이었다. 전반전보다는 좋은 경기를 했지만, 후반 30분 김동섭에게 PK 실점을 내주며 다시 힘이 풀렸다. 안타까운 마음에 항의도 해봤지만, 직전 장면에서의 볼처리 미숙과 경험 부족이 문제였다. 이창훈은 프로로 데뷔한 강원 시절부터 유사한 드리블 모션을 보여왔는데, 이를 처음 맞는 대학 선수가 익숙할 리 없었다.

뒤늦게 추격골이 터졌다. 후반 35분, 정원진이 연결한 낮은 프리킥을 장순규가 쇄도하며 발을 댄 것. 단 몇 초가 아까워 세레머니도 하지 못했다. 얼른 볼을 갖고 중앙선으로 달려가 경기 재개를 기다렸다. 하지만 수비 진영에서의 실수가 또다시 발목을 잡았다. 추가 실점은 없었지만, 공격 기세를 이어가는 데에는 치명적이었다. 혹여나 꺼질까 약한 바람으로 조심스레 살려야 했던 불씨에 찬물을 양동이째 끼얹었다. 고대했던 동점골은 터지지 않았고, 그렇게 영남대의 FA컵 도전기도 8강에서 막을 내렸다. 무릎 꿇고, 주저앉고, 고개를 떨군 제자들의 모습, 그리고 패배라는 결과에 김 감독은 말했다.


"우리가 해야 할 건 다 했다고 생각한다. 우리 아이들이 굉장히 침울해했다. 왜 침울한지 이해를 못 하겠다. 많이 아쉬운 것 같다. 하지만 져서 잘했다는 분위기보다 져서 이렇게 침울하게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본다. 이번 계기로 아이들이 한 번 더 성숙해지길 바란다."

"공격을 잘하면 수비를 못 하고, 수비를 잘하면 공격을 못 한다. 축구란 늘 그런 것이다.? 전반에 일단 실점하지 않고, 후반에 우리의 흐름을 타려는 계획을 세웠다. 아마 전반전부터 그렇게 했다면 후반전에는 힘들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뭘 먼저 할까를 고민했고, 우선 실점을 하지 않는 것에 중점을 뒀다. 90분간 성남 선수들과 싸우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철학이 무너지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걸 오늘 처음 느꼈다. 우리가, 아니 내가 너무 두려워하지는 않았나. 새 옷을 입으면 불편하듯 전반전(쓰리백)에는 우리의 축구가 아니었다. 경기는 마쳤지만, 경험으로 잘 받아들여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고 싶지 않다.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 <홍의택 객원기자, 제대로 축구(http://blog.naver.com/russ1010)>

※객원기자는 이슈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위해 스포츠조선닷컴이 섭외한 파워블로거입니다. 객원기자의 기사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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