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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보 감독의 첫 실패, 강하면 부러진다

김성원 기자

기사입력 2014-06-27 07:33


2014브라질월드컵 H조 3차전 한국과 벨기에의 경기가 27일 (한국시간) 상파울루의 아레나 코린치안스경기장에서 열렸다. 홍명보 감독이 울고 있는 손흥민을 위로하고 있다.
상파울루(브라질)=최문영 기자 deer@sportschosun.com /2014.06.27/

2009년 이집트 국제축구연맹 청소년월드컵(20세 이하) 8강,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동메달, 2012년 런던올림픽 동메달, 감독 홍명보가 걸어온 길이다.

그러나 월드컵의 벽은 높았다. 홍명보 월드컵대표팀 감독이 브라질에서 첫 실패를 경험했다. 홍명보호가 27일(한국시각) 브라질 상파울루 아레나 코린치안스에서 벌어진 벨기에와의 2014년 브라질월드컵 조별리그 H조 최종전에서 0-1로 패했다. 1무2패를 기록한 한국은 H조 최하위로 브라질월드컵을 마감했다. 사상 첫 월드컵 원정 8강이 고지였다. 그러나 조별리그를 통과하지 못했다.

홍 감독은 월드컵의 산역사다. 21세 때 처음 월드컵 무대를 밟았다.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이었다. 1무2패로 쓸쓸히 발길을 돌렸다. 1994년 미국월드컵에선 수비와 미드필더를 오가면 2골을 터트렸다. 그러나 2무1패로 짐을 쌌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도 고난의 무대였다. 1무2패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월드컵은 항상 벽에 부딪히고 넘을 수 없는 큰 산으로 느꼈다. 반전은 선수 인생의 황혼기인 33세 때 이루어졌다. 2002년 한-일월드컵이었다. 주장 완장을 찬 그는 대한민국에 4강 신화를 선물했다. 스페인과의 8강전에선 승부차기 마지막 키커로 나서 4강행의 마침표를 찍었다.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을 필두로 2002년 한-일월드컵까지 한국이 치른 17경기에 연속 선발 출전했다. 앞으로도 깨지기 힘든 기록이다.

브라질월드컵은 6번째 월드컵이었다. 현역 은퇴 후 행정가 수업을 받던 그는 2005년 현장으로 돌아왔다. 2006년 독일월드컵의 지휘봉을 잡은 아드보카트 감독이 '자연인 홍명보'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사령탑으로는 첫 월드컵 도전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지난해 6월 브라질월드컵대표팀 감독에 선임됐다. 1년이 흘렀다. 전임 감독 시절의 일이었던 '기성용 SNS 논란'을 시작으로 고행의 길이었다. 중심을 잃지 않았지만, 꺾지 않은 자존심은 독이었다.

벨기에전에선 원톱 박주영과 골키퍼 정성룡 카드를 접었지만 용병술은 탄력적이지 못했다. 1m96 김신욱과 김승규를 좀 더 활용했더라면 어땠을까하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최종엔트리 선발 과정에선 K-리그에서 가장 '핫'했던 이명주와 오른쪽 윙백 차두리를 뽑지 않은 데 대해서는 아쉬운 부분이었다. '의리 축구'에 포장되면 여론의 극한 반격을 허용했다.

2년 전 그는 사상 첫 올림픽 동메달 신화를 연출했다. 1승2무로 조별리그를 통과한 홍명보호는 8강전에서 개최국 영국과 맞닥뜨렸다. 객관적인 전력에서 열세였다. 1대1로 비긴 후 승부차기에서 5-4로 승리하며 '축구 종가'를 정복했다. 브라질과의 4강전에서 0대3로 완패하며 기세가 꺾였다. 동메달결정전 상대는 '숙적' 일본이었다. 모아니면 도였다. 일본에 패할 경우 공든탑이 한꺼번에 무너질 수 있었다. 벼랑 끝에서 동메달 기적을 빚었다. 한국 축구의 새 장이었다.


하지만 브라질과는 인연이 없었다. 벨기에전에선 수적 우세를 누리지 못했다. 김보경과 지동원 교체카드도 신통치 않았다.

"우리가 많이 부족했다. 특히 내가 많이 부족했다, 하지만 젊은 선수들의 미래가 더 충만된다. 한국 축구 더 발전해야 한다. 내가 가장 많이 부족했다." 홍 감독의 탄식이었다. 그러나 브라질월드컵을 통해 그는 새로운 세상을 배웠다.
김성원 기자 newsme@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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