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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이집트 국제축구연맹 청소년월드컵(20세 이하) 8강,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 동메달, 2012년 런던올림픽 동메달, 감독 홍명보가 걸어온 길이다.
월드컵은 항상 벽에 부딪히고 넘을 수 없는 큰 산으로 느꼈다. 반전은 선수 인생의 황혼기인 33세 때 이루어졌다. 2002년 한-일월드컵이었다. 주장 완장을 찬 그는 대한민국에 4강 신화를 선물했다. 스페인과의 8강전에선 승부차기 마지막 키커로 나서 4강행의 마침표를 찍었다.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을 필두로 2002년 한-일월드컵까지 한국이 치른 17경기에 연속 선발 출전했다. 앞으로도 깨지기 힘든 기록이다.
브라질월드컵은 6번째 월드컵이었다. 현역 은퇴 후 행정가 수업을 받던 그는 2005년 현장으로 돌아왔다. 2006년 독일월드컵의 지휘봉을 잡은 아드보카트 감독이 '자연인 홍명보'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사령탑으로는 첫 월드컵 도전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벨기에전에선 원톱 박주영과 골키퍼 정성룡 카드를 접었지만 용병술은 탄력적이지 못했다. 1m96 김신욱과 김승규를 좀 더 활용했더라면 어땠을까하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최종엔트리 선발 과정에선 K-리그에서 가장 '핫'했던 이명주와 오른쪽 윙백 차두리를 뽑지 않은 데 대해서는 아쉬운 부분이었다. '의리 축구'에 포장되면 여론의 극한 반격을 허용했다.
2년 전 그는 사상 첫 올림픽 동메달 신화를 연출했다. 1승2무로 조별리그를 통과한 홍명보호는 8강전에서 개최국 영국과 맞닥뜨렸다. 객관적인 전력에서 열세였다. 1대1로 비긴 후 승부차기에서 5-4로 승리하며 '축구 종가'를 정복했다. 브라질과의 4강전에서 0대3로 완패하며 기세가 꺾였다. 동메달결정전 상대는 '숙적' 일본이었다. 모아니면 도였다. 일본에 패할 경우 공든탑이 한꺼번에 무너질 수 있었다. 벼랑 끝에서 동메달 기적을 빚었다. 한국 축구의 새 장이었다.
하지만 브라질과는 인연이 없었다. 벨기에전에선 수적 우세를 누리지 못했다. 김보경과 지동원 교체카드도 신통치 않았다.
"우리가 많이 부족했다. 특히 내가 많이 부족했다, 하지만 젊은 선수들의 미래가 더 충만된다. 한국 축구 더 발전해야 한다. 내가 가장 많이 부족했다." 홍 감독의 탄식이었다. 그러나 브라질월드컵을 통해 그는 새로운 세상을 배웠다.
김성원 기자 newsme@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