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축사부일체]⑥윤석영,장흥中감독"축구는 어머니,속이 빨리든 아이"

전영지 기자

기사입력 2014-05-18 16:39 | 최종수정 2014-05-19 08:13




서울에서 375km, 자동차로 꼬박 4시간 30분, 전남 장흥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장흥 IC를 지나 좁은 골목을 굽이굽이 돌아들어가니, 나직나직 정겨운 시골마을의 풍경이 펼쳐졌다. "올려!" "간다!" "해!" 볕이 쨍쨍한 5월의 학교 운동장, 까까머리 선수들의 외침이 청량하게 울려퍼졌다. 10년 전 전라도의 낯선 마을, 장흥에 첫발을 내디뎠을 '수원소년' 윤석영(24·QPR)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시골에서 올림픽, 월드컵을 나가는 선수가 나오다니, 제가 고맙죠." 그후로 10년, 그곳에서 변함없이 '윤석영 후배'들을 키우고 있는 김동군 장흥중학교 감독이 웃었다. 장흥중 출신 최초로 월드컵대표의 꿈을 이룬 기특한 제자의 옛날이야기를 조근조근 털어놨다. '축구는 어머니' 속이 빨리 든 아이

윤석영은 어느 인터뷰에서 "축구는 어머니"라고 말했었다. 초등학교 5학년때 위암으로 투병하던 어머니를 잃었다. 그리고 운명처럼, 선물처럼, 축구가 찾아왔다. 아내를 여의고 황망해 하던 아버지 윤남중씨에게 축구선수를 열망하는 아들의 미래는 어려운 숙제였다. 수원의 미등록 축구팀에서 지는 것에 이골이 났던 아들은 정식축구부가 있는 학교로의 전학을 강력하게 희망했다. 마침 어머니의 절친이 장흥초-중학교를 적극 추천했다. '고데로(고종수-데니스-산드로 ) 트리오'를 사랑하던 '수원소년' 윤석영은 장흥을 택했다. 그렇게 축구의 꿈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열살 남짓한 소년에게 수원과 장흥의 심리적 거리는 상상 이상이었다. 스마트폰은 커녕 수원으로 가는 직통버스도 없던 시절이다. 식당을 운영하던 아버지 또한 생계에 쫓겨 자주 내려오지 못했다. 주말이면 전라도 인근 지역선수들은 하나둘 집으로 떠났다. 윤석영은 개의치 않았다. 김 감독, 여덟살 위 김재민 코치와 함께 숙소에 남았다. '축사부일체', 축구와 감독은 윤석영에게 부모였다. "주말에도 늘 공을 찼죠. 석영이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365일 개인훈련을 쉬지 않았어요." 집에도 친구들에게도, 힘든 내색 한번 하지 않았다. 어릴 적 사진을 찾는 기자에게 아버지 윤씨는 "아이 엄마가 아파서 애들과 변변한 추억도 못만들었다"고 민망해 했지만, 정작 윤석영 본인은 "축구가 재밌어서, 힘든 줄도 몰랐던 시기"라고 했다. 김 감독은 "어리지만 축구가 더 절실했을 거예요. 또래보다 속이 빨리 들었어요"라고 했다.

중학교 축구부 운영은 대부분 학부모들의 회비로 충당된다. "아버님 식당이 잘 안되면서 석영이의 월납금이 밀리곤 했었는데…. 그때 아버님께 약속드렸죠. 중학교까지만 고생하시라고, 고등학교때부터는 경제적인 부분이 다 해결될 거라고." 약속은 지켜졌다. 장흥중 졸업을 앞두고 광양제철고, 포철공고, 용인축구센터 등 내로라하는 유스 클럽팀의 러브콜이 밀려들었다. '축구밖에 모르는 소년' 윤석영은 '전남 유스' 광양제철고에 진학했다.


◇윤석영의 장흥중학교는 춘계연맹전, 왕중왕전, 2005년 탐라기 전국중학교 축구대회에서 3관왕에 올랐다. 김동군 감독은 장흥중 지휘봉을 잡은 첫해, 첫제자 윤석영과 함께 3관왕의 쾌거를 일궜다. 사진제공=김동군 장흥중 감독
윤석영, 선수 보는 눈을 바꿔놓은 선수

윤석영의 중학교 시절을 묻자 김 감독이 대뜸 1m65 남짓 호리호리한 선수 하나를 지목했다. "저기 ○번 선수 보이시죠? 석영이가 딱 저만 했죠. 저렇게 왜소했지만, 유연성이 뛰어났어요."

윤석영은 김 감독의 첫 제자다. 김 감독은 일화 천마, 천안 일화 (1994~1998년), 전북 현대(2000년) 미드필더 출신이다. 선수 은퇴 직후 고향 장흥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서른넷이던 2005년 장흥중 감독이 됐다. 윤석영의 장흥중은 춘계연맹전, 왕중왕전, 탐라배를 휩쓸며 3관왕에 올랐다. '왼쪽 윙어' 윤석영은 울산현대중과의 탐라배 결승전(1대0 승)에서 헤딩 결승골로 우승을 이끌었다. "석영이가 사실 헤딩을 잘하는 선수는 아니었어요. 경기후 '네가 헤딩골을 다 넣었냐'며 웃었던 기억이 나요. 중요한 경기에선 틀림없이 제몫을 해주는 선수였죠."

30대 초반 열정적인 감독의 기억속에 남은 윤석영은 "눈망울이 똘망똘망하고, 호리호리하던 아이"다. 이어 김 감독은 중요한 이야기를 했다. "석영이는 내게 선수 보는 눈을 바꿔준 선수예요. 중학교는 몸도 마음도 많이 변화하는 시기입니다. 기량보다 중요한 건 가능성과 인성"이라고 말했다. "석영이보다 더 잘했던 선수도 있어요. 그런데 중간에 많이 그만뒀죠." 포기하지 않는 성실함과 축구를 향한 열정이 '차이'를 만들었다. 윤석영은 고등학교, 프로, 대표팀을 거치며 진화를 거듭했다. "중학교때 대부분 몸이 좋고, 빠른 선수들을 주목합니다. 석영이는 발재간은 좋았지만, 왜소했고, 활동량은 많고 유연했지만 ,파워는 부족했어요. 석영이는 한눈에 띄는 선수라기보다는 볼수록 좋은 선수였어요. 짜증내거나 포기하지 않았고, 감독의 말을 빨리 받아들였죠. 해결하는 역할보다 만들어주는 역할을 했고, 상황판단이 빠른 팀플레이어였어요. 근지구력 만큼은 최고였죠. 운동장 20바퀴 선착순을 뛰면 어찌 됐든 1등으로 들어왔으니까요."


'후천적 왼발잡이', 폭풍 왼발은 노력의 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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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영의 왼발 킥은 대표팀은 물론 QPR에서도 전담키커로 인정받을 만큼 날카롭다. 김 감독은 '선천적 왼발잡이'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왼발이 좋길래, '너 왼발잡이냐' 물었더니 '오른발잡인데요' 하더라"는 것이다. "양발을 쓴다는 것은 수비를 헷갈리게 하는, 선수로서 굉장한 장점이었다"고 했다. 윤석영에게 직접 확인했다. 동네축구를 하던 수원 시절 병아리를 사러 뛰어가다 택시에 부딪힌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오른발을 다쳤어요, 축구를 너무 하고 싶어 왼발로 계속 연습했죠. 이젠 왼발이 더 편하고요." 윤석영은 '후천적 왼발잡이'였다. 고등학교 이후 '왼쪽 풀백'으로 전향한 윤석영의 전매특허인 오버래핑, 1대1 돌파에 이은 왼발 크로스는 장흥중 시절부터 10년 넘게 연마한, 피나는 노력의 산물이다.

윤석영에게 '장흥'은 축구의 초심이 깃든, 가슴 설레는 추억의 장소다. 지난해까지 수원에서 건강원을 운영한 윤석영의 아버지는 요즘에도 가끔씩 김 감독에게 "가정형편이 어려운 애들이 없냐"고 묻는다. 선수들을 위해 직접 달인 보약을 학교로 보내곤 했다. 윤석영은 런던올림픽이 끝난 후 장흥중학교 운동장에서 개인훈련을 했다. QPR행이 확정된 후엔 후배들의 단체 유니폼도 맞춰줬다.

오후 8시, 식판 위 밥을 게눈 감추듯 먹어치운 까까머리 선수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올해 춘계연맹전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린 소년들이, 불밝힌 운동장, 별빛 아래 야간 개인훈련을 시작했다. "야! 골라인에 딱 걸리면 프리미어리그에서 골로 인정하냐, 안하냐?" 슈팅연습을 하는가 싶더니 왁자지껄, 때아닌 축구 논쟁이 불붙었다. 10년전 남몰래 월드컵, 빅리그를 꿈꾸던 '축구소년'윤석영이 떠올라 슬몃 웃음이 났다. 꿈★은 이루어진다.
장흥=전영지기자 sky4us@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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