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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375km, 자동차로 꼬박 4시간 30분, 전남 장흥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장흥 IC를 지나 좁은 골목을 굽이굽이 돌아들어가니, 나직나직 정겨운 시골마을의 풍경이 펼쳐졌다. "올려!" "간다!" "해!" 볕이 쨍쨍한 5월의 학교 운동장, 까까머리 선수들의 외침이 청량하게 울려퍼졌다. 10년 전 전라도의 낯선 마을, 장흥에 첫발을 내디뎠을 '수원소년' 윤석영(24·QPR)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시골에서 올림픽, 월드컵을 나가는 선수가 나오다니, 제가 고맙죠." 그후로 10년, 그곳에서 변함없이 '윤석영 후배'들을 키우고 있는 김동군 장흥중학교 감독이 웃었다. 장흥중 출신 최초로 월드컵대표의 꿈을 이룬 기특한 제자의 옛날이야기를 조근조근 털어놨다. '축구는 어머니' 속이 빨리 든 아이
중학교 축구부 운영은 대부분 학부모들의 회비로 충당된다. "아버님 식당이 잘 안되면서 석영이의 월납금이 밀리곤 했었는데…. 그때 아버님께 약속드렸죠. 중학교까지만 고생하시라고, 고등학교때부터는 경제적인 부분이 다 해결될 거라고." 약속은 지켜졌다. 장흥중 졸업을 앞두고 광양제철고, 포철공고, 용인축구센터 등 내로라하는 유스 클럽팀의 러브콜이 밀려들었다. '축구밖에 모르는 소년' 윤석영은 '전남 유스' 광양제철고에 진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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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영은 김 감독의 첫 제자다. 김 감독은 일화 천마, 천안 일화 (1994~1998년), 전북 현대(2000년) 미드필더 출신이다. 선수 은퇴 직후 고향 장흥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서른넷이던 2005년 장흥중 감독이 됐다. 윤석영의 장흥중은 춘계연맹전, 왕중왕전, 탐라배를 휩쓸며 3관왕에 올랐다. '왼쪽 윙어' 윤석영은 울산현대중과의 탐라배 결승전(1대0 승)에서 헤딩 결승골로 우승을 이끌었다. "석영이가 사실 헤딩을 잘하는 선수는 아니었어요. 경기후 '네가 헤딩골을 다 넣었냐'며 웃었던 기억이 나요. 중요한 경기에선 틀림없이 제몫을 해주는 선수였죠."
30대 초반 열정적인 감독의 기억속에 남은 윤석영은 "눈망울이 똘망똘망하고, 호리호리하던 아이"다. 이어 김 감독은 중요한 이야기를 했다. "석영이는 내게 선수 보는 눈을 바꿔준 선수예요. 중학교는 몸도 마음도 많이 변화하는 시기입니다. 기량보다 중요한 건 가능성과 인성"이라고 말했다. "석영이보다 더 잘했던 선수도 있어요. 그런데 중간에 많이 그만뒀죠." 포기하지 않는 성실함과 축구를 향한 열정이 '차이'를 만들었다. 윤석영은 고등학교, 프로, 대표팀을 거치며 진화를 거듭했다. "중학교때 대부분 몸이 좋고, 빠른 선수들을 주목합니다. 석영이는 발재간은 좋았지만, 왜소했고, 활동량은 많고 유연했지만 ,파워는 부족했어요. 석영이는 한눈에 띄는 선수라기보다는 볼수록 좋은 선수였어요. 짜증내거나 포기하지 않았고, 감독의 말을 빨리 받아들였죠. 해결하는 역할보다 만들어주는 역할을 했고, 상황판단이 빠른 팀플레이어였어요. 근지구력 만큼은 최고였죠. 운동장 20바퀴 선착순을 뛰면 어찌 됐든 1등으로 들어왔으니까요."
'후천적 왼발잡이', 폭풍 왼발은 노력의 산물
윤석영에게 '장흥'은 축구의 초심이 깃든, 가슴 설레는 추억의 장소다. 지난해까지 수원에서 건강원을 운영한 윤석영의 아버지는 요즘에도 가끔씩 김 감독에게 "가정형편이 어려운 애들이 없냐"고 묻는다. 선수들을 위해 직접 달인 보약을 학교로 보내곤 했다. 윤석영은 런던올림픽이 끝난 후 장흥중학교 운동장에서 개인훈련을 했다. QPR행이 확정된 후엔 후배들의 단체 유니폼도 맞춰줬다.
오후 8시, 식판 위 밥을 게눈 감추듯 먹어치운 까까머리 선수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올해 춘계연맹전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린 소년들이, 불밝힌 운동장, 별빛 아래 야간 개인훈련을 시작했다. "야! 골라인에 딱 걸리면 프리미어리그에서 골로 인정하냐, 안하냐?" 슈팅연습을 하는가 싶더니 왁자지껄, 때아닌 축구 논쟁이 불붙었다. 10년전 남몰래 월드컵, 빅리그를 꿈꾸던 '축구소년'윤석영이 떠올라 슬몃 웃음이 났다. 꿈★은 이루어진다.
장흥=전영지기자 sky4u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