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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저놈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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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감독은 코치진을 모두 불렀다. 중학교 두 팀이 격돌한 연습경기였다. 그 날의 '환희'는 여전히 기억의 한 켠을 차지하고 있다. "전반 35분 만에 아버지 오라고 했다."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가 매력인 스승의 입가는 미소로 가득했다.
이청용이 조 감독의 마음을 훔쳤다. 그러나 프로 입단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조 감독은 이청용의 아버지에게 "경기를 이해하면서 플레이하는 것은 어릴 때 심어줘야 한다"고 설득했다. 아버지는 고민했지만 아들은 "자신있다"고 했다. 이청용은 학업을 포기하고 프로선수가 됐다. 조 감독은 "대학을 졸업하고 입단한 이영표의 계약금이 1억2000만원이었다. 이청용에게는 계약금으로 1억3000만원을 줬다. 미래에 대한 투자였다"며 웃었다. 만약 고등학교에 진학했다면 오늘의 이청용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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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어려도 프로는 프로다. 갓 입단한 이청용은 동계훈련기간에 키프로스 해외 전지훈련을 함께했다. 조 감독은 A~C그룹으로 나누었다. C그룹에는 이청용을 포함한 앳된 중학생 그룹이 포진했다. 동유럽 2군과의 평가전에 투입했는데 이청용도 잔뜩 겁을 먹었다. 뛰어난 체격조건에 압도당해 '축구'를 하지 못했다. 결과는 참패였다. 조 감독은 처음 화를 냈다고 한다. "상대가 어떻든 용기가 없으면 안된다. 이런 식이면 다들 한국으로 돌아가라." 호통을 쳤다.
조 감독의 훈련 프로그램은 특별했다. 체력 훈련을 금지시켰다. 첫째도 기술, 둘째도 기술이었다. 좁은 지역에서 모든 플레이를 하도록 지시했다. 특히 패싱과 포지션별 대응 능력, 볼컨트롤을 강조했다. 롱킥은 절대금지였다. 이를 어기면 페널티가 주어졌다.
조 감독은 "이같은 훈련을 1~2년간 계속해서 시켰는데 엄청 달라지더라. 2군 경기에 투입했는데 체력은 떨어졌지만 정말로 경기를 재밌게 했다. 청용이는 그때부터 영악하게 경기를 했다. 무리수를 안 두면서도 영리하게 상대를 이용하며 플레이를 했다"며 엄지를 세웠다. 서울을 거쳐 볼턴(잉글랜드)에 둥지를 트는 결정적인 밑거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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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용은 연습벌레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자신을 혹사시켰다. 철저한 자기관리는 성장동력이었다. 사춘기도 없었다. 세상의 유혹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린 이청용은 선배들이 인정할 정도로 진정한 프로선수로 성장했다. 조 감독은 "자신이 프로라는 것을 스스로 느꼈던 것 같다. 규율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 생활은 철두철미했다. 약하게 보였지만 강단이 있었다. 프로개념이 아주 강했던 아이였다. 결국 땀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4년 전 남아공월드컵을 누빈 이청용은 홍명보호의 핵이다. 브라질월드컵이 목전이다. 이청용은 조 감독이 A대표팀을 이끌 당시 '만화 축구'라는 말을 만들었다. 만화에서 나올 축구를 주문한다는 '투정'이었다. 조 감독은 "내가 하고 싶은 표현을 청용이가 했다. 브라질에서 만화 축구같이 해야한다"며 활짝 웃었다.
애제자를 향한 바람은 컸다. 그는 "청용이는 다른 선수보다 경기 생각에 대한 템포가 빠르다. 그래서 찬스를 더 많이 잡는다"며 "상대 진영에서 공격을 할때 득점에 대한 생각을 더 강하게 가져야 한다. 볼을 차는 것보다 보는 것이 먼저다. 골키퍼의 위치를 확인한 후 늘 슈팅을 하겠다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슈팅도 과감해야 한다. 그러면 분명 득점을 더 많이 할 것"이라고 했다.
조 감독의 대명사는 '단디해라'다. 그 말도 잊지 않았다. "브라질월드컵에서 분명 좋은 결과를 믿는다. 청용아 단디해라." '단디해라'는 잘하라는 뜻이지만 그 속에는 '무한 자율', '무한 책임'이 상생한다.
10년이 흘렀지만 스승의 사랑은 100℃를 훌쩍 넘었다.
김성원 기자 newsme@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