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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스물한 살 유고 청년 라데 보그다노비치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 내전 중인 고국에서 축구 인생을 살아가긴 힘들었다.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살기 위해' 해외 진출을 고민했다. 극동의 포항이라는 구단에서 입단테스트 제의를 받았다. 6번에 달하는 연습경기를 거치며 혹독한 테스트를 받았다. 군말 할 처지가 아니었다. 포항의 붉은 유니폼을 입는 순간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한국 프로축구 30년사에 레전드 중 하나로 꼽히는 '라데'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이날 스틸야드에는 라데 외에도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일만 친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회택 이흥실 최순호 김기동 등 포항 유니폼을 입은 '레전드'들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세월의 풍파 속에 얼굴에는 주름이 생겼고, 날렵했던 몸매도 오간데 없었다. 그러나 이날만큼은 모두가 그때 그시절로 돌아가 검붉은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를 누볐다. 지난 시즌 직후 전북 감독직에서 물러난 뒤 유럽 연수를 다녀온 이흥실 전 감독은 "내가 뛸 당시엔 스틸야드가 막 완공됐다. 원정팀 선수들이 경기장에 들어서면 신기해서 제대로 공격을 못했다"며 "앞으로도 프로축구가 발전해 이런 기념행사가 많이 열렸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밝혔다.
포항=박상경 기자 ppark@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