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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단의 역량은 위기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잘 나갈 때는 좋지 않은 부분이 승리에 가려지기 마련이다.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승점을 따내고 앞으로 진군한다. 위기에 빠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소한 잘못도 크게 불거진다. 위기가 길어지면 선수단은 물론이고 프런트들과 팬들까지도 힘든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다. 위기에서 잘 빠져나와야 진정한 강팀으로 거듭날 수 있다. 방법은 하나다. 선수단과 프런트, 팬들까지 서로를 믿는 것 뿐이다.
박경훈 제주 감독에게는 악몽같은 69일이었다. 7월 21일 전남과의 22라운드 홈경기에서 6대0으로 승리할 때만 하더라도 분위기는 상당히 좋았다. 나흘 뒤 경남 원정에서 1대3으로 질때만 하더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24라운드 서울과의 홈경기에서 3대3으로 비기며 제 궤도에 올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8월 4일 열린 25라운드 상주 원정경기에서 1대2로 지면서 삐걱대기 시작했다.
선수단이 힘들어할 때 프런트들과 팬들이 나섰다. 프런트들은 선수단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용기를 북돋우어줄 수 있는 아이디어를 냈다. 한자성어였다. 일주일에 1번, 15분씩 한자성어 공부도 시작했다. 교양을 쌓으면서도 선수들에게 힘을 불어넣겠다는 의지였다. '임전무퇴(臨戰無退,전쟁에 나가서 후퇴하지 않는다)'와 '즉사필승(卽死必勝,죽을 각오로 반드시 이기자)'이라는 한자성어를 공부했다. 프런트들은 현수막을 만들었다. 이 말들을 넣어 클럽하우스 입구에 붙였다. 선수들은 이 글귀를 보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팬들 역시 힘을 보탰다. 경기 결과가 좋지 않음에도 경기장을 꾸준히 찾았다. 10경기 연속 무승을 거두고 있을 때도 제주의 홈 평균 관중은 6832명이었다. 10경기 무승 행진이 시작되기 전인 6268명보다 더 늘었다. 꾸준한 사랑을 보여주었다.
제주 선수단도 힘을 냈다. 27일 포항과의 33라운드 홈경기를 타깃으로 삼았다. 제주는 자신이 잘하는 것을 버렸다. 4-2-3-1 전형의 패싱 축구가 아닌 4-4-2 전형을 들고 나왔다. 공격의 핵심 송진형을 스타팅에서 제외했다. 최전방 투톱 서동현과 마르케스에게 볼을 집중시켰다.
장고 끝에 악수가 될 수도 있었다. 어차피 모 아니면 도였다. 물러설 곳이 없었다. 파격은 맞아떨어졌다. 틀을 깬 전술이 선수들의 공격 본능을 깨웠다. 후반 20분 서동현, 36분 배일환이 골폭죽을 쏘았다. 포항은 뒤늦게 후반 추가시간 유창현이 한 골을 만회했다. 하지만 더 이상의 골을 넣지 못했다. 제주가 10경기 무승 행진을 끊는 순간이었다. 박 감독은 경기 후 "너무 긴 터널을 거쳤다. 선수단과 프런트, 팬들이 모두 하나가 되었기에 승리할 수 있었다"고 했다.
제주=이 건 기자 bbadagu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