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대운'품은 홍명보, 히딩크 그림자를 지웠다

박상경 기자

기사입력 2012-08-11 05:40


◇홍명보 올림픽대표팀 감독. 런던=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2012년 8월 11일(한국시각). 한국 축구사의 한 페이지를 새롭게 썼다. '숙적' 일본을 꺾고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을 목에 거는 신화를 만들었다. 한국이 나선 국제대회 역대 최고 성적(3위)이기도 하다.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 거스 히딩크 감독(4위)도 넘지 못한 벽이었다. 홍명보 감독(43)이 새로운 역사의 주연이었다.

홍 감독의 과거는 눈물이었다. 동북고 1학년 때의 키가 1m60 남짓이었다. 합숙훈련을 하면서 우유에 밥을 말아 먹기 시작했다. 남들은 웃을 일이지만 우유에 밥을 마는 심정은 처절했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고교 2학년 때 불과 몇 달 사이에 1m79까지 컸다. 베스트 멤버로 기용된 것도 그때부터다. 엘리트 코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청소년대표를 들락날락했지만 제대로 된 세계대회 한 번 출전하지 못했다. 그저 그런 '미완의 대기'였다.

20세 때인 1989년 세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 대표팀에 발탁됐다. 터닝포인트였다. 10년 주기로 한국 축구를 뒤흔든 기적을 일궈냈다. 1992년 처음으로 줄기를 바꿨다. 1991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드래프트에 참가하지 않고 군에 입대했다. 1992년 포철(현 포항)에 입단, K-리그에 데뷔했다. 23세의 어린 나이지만 그는 달랐다. 포철의 철벽 수비라인을 이끌며 팀의 우승을 일궈냈다. 신인상과는 격이 맞지 않았다. 프로축구 사상 처음으로 신인 선수가 MVP(최우수선수)에 오르는 영예를 누렸다.

10년이 흐른 2002년, 현역 시절의 꽃이 만개했다. 1990년 이탈리아 대회를 필두로 4회 연속 월드컵 무대에 섰다. 월드컵은 늘 두려운 벽이었다. 긴장감과 압박감에 시달렸다. 피날레 무대인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반전에 성공했다. 주장 완장을 찬 그는 스페인과의 8강전 승부차기에서 마지막 키커로 나섰다. 4-3. 그의 발을 떠난 볼이 골망을 출렁였다. 세계가 놀랐다. 월드컵 4강이었다. 그의 백만달러짜리 미소에 대한민국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또 10년이 지났고, 그는 선장으로 런던올림픽 한국 축구의 지휘봉을 잡았다. 북중미의 멕시코(0대0 무), 유럽의 스위스(2대1 승), 아프리카의 가봉(0대0 무)에 이어 영국을 만났다. 주눅들지 않았다. 태극전사들의 투혼에 영국은 없었다. 세계가 다시 한번 놀란 이변이었다.

세상은 과정이 아닌 환희만을 기억한다. 실력보다는 운이 좋다는 말을 한다. 모르는 얘기다. 그는 고통, 눈물과 동거했다. 10년 전 월드컵대표팀 승선까지 굴곡의 연속이었다. 거스 히딩크 감독은 '선수 길들이기'의 달인이다. 33세 최고참 홍명보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 만큼 혹독했다.

2005년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시샘으로 가득했다. 지도자 자격증이 문제가 됐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는 감독 후보 1순위였지만 "초등학교 감독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대표팀을 이끄느냐"는 비아냥거림이 쏟아지면서 결국 낙마했다.

런던올림픽을 위한 시간은 길었다. 4년을 준비했다. 2009년 감독 시대가 열렸다. 무명의 선수들과 함께 국제축구연맹(FIFA) 청소년월드컵에 출전했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다. 'Never Stop(절대 멈추지 않는다)', 'Let's make a history(역사를 만들자)', 그들만의 철학을 공유했다. 첫 국제 무대에서 그는 8강 신화를 작성했다. 구자철(아우크스부르크) 김영권(광저우 헝다) 김보경(카디프시티) 윤석영(전남) 등 한국 축구 미래들이 세상에 나왔다.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은 색다른 도전이었다. 23세 이하로 채울 수 있지만 올림픽을 대비, 대부분을 21세 이하 선수들로 꾸렸다. 기대가 실망으로, 다시 희망으로 바뀌었다. 금메달 외에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병역 혜택이 걸린 금메달 중압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동메달에 만족해야 했지만, 결실은 메달 색깔이 아니었다. "대회 전에는 금메달이 아니면 의미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15~16년 동안 축구를 했지만 후배들이 나에게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한 무엇인가를 깨우쳐 줬다. 축구를 떠나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다." 와일드카드 박주영의 감격이었고, 홍명보호의 주소였다.

7회 연속 올림픽 본선 진출도 순탄치 않았다. A대표팀과의 중복 차출로 마음고생을 했다. 올림픽 예선의 경우 A매치와 달리 선수 소집 의무 규정이 없다. 유럽파는 논외였다. J-리거도 읍소를 해야 가능했다. 어떻게 변할 지 몰라 베스트 11이 없었다. "우리 팀은 스토리가 있다"는 말로 위안을 삼았다.

용병술은 특별했다. "난 너희들을 위해 항상 등 뒤에 칼을 꽂고 다닌다. 너희들도 팀을 위해 등 뒤에 칼을 하나씩 가지고 다녀야 한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감독이 책임진다는 메시지였다. 선수들을 향해 오로지 목표를 향해서 뛰어가라는 명령이었다. 홍명보호는 생존했다. 조 1위로 런던올림픽 티켓을 거머쥐었다.

"군대를 안 가면 내가 대신 가겠다"는 말로 박주영의 병역 연기 논란을 잠재웠다. 홍정호(제주) 장현수(FC도쿄) 한국영(쇼난 벨마레) 등이 부상으로 잇따라 낙마했다. 시련은 있었지만 꿈은 꺾이지 않았다.

선수들은 홍 감독에게는 특별한 아우라가 있단다. 홍 감독은 늘 맨앞에 서 있었다. 때론 카리스마를 앞세운 강력한 리더십으로, 때론 눈물도 숨기지 않는 부드러운 모습으로 선수들에게 감동을 선물했다. 개인보다는 팀, 기량보다는 정신력이 우선이었다. 늘 준비돼 있었기에 신화의 중심에 설 수 있었다.

홍명보호의 기나긴 항해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됐다. 런던올림픽에서 한국 축구의 역사를 바꿨다. 홍 감독이 이룬 작품이다. 한국 축구는 첫 올림픽 메달을 안으면서 세계 무대에 다시금 저력을 떨쳤다.
박상경 기자 ppark@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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