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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이 내가 걸어야 할 길이라면 피하고 싶지는 않다. 선수 시절 쌓아놓은 명예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받아들이겠다."
우여곡절 끝에 2009년 감독 홍명보 시대가 열렸다. 20세 이하 청소년대표팀을 이끌었다. 우려는 여전했지만 훌륭한 첫 단추로 잠재웠다. 그 해 이집트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청소년월드컵에서 8강 신화를 연출했다. 구자철(아우크스부르크) 김영권(광저우 헝다) 김보경(세레소 오사카) 윤석영(전남) 오재석(강원)등 한국 축구 미래들이 세상에 나왔다. 'Never Stop(절대 멈추지 않는다)', 'Let's make a history(역사를 만들자)'가 그의 철학이었다.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은 두 번째 도전이었다. 희비의 쌍곡선을 그렸다. 기대가 실망으로, 다시 희망으로 바뀌었다. 금메달 외에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병역 혜택이 걸린 금메달 중압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정신적 부담은 발을 무겁게 했다. 결승 진출 문턱인 4강전에서 아랍에미리트를 만나 연장 혈투를 치렀지만 끝내 좌초했다. 0대1로 무릎을 꿇었다.
7회 연속 올림픽 본선 진출은 순탄치 않았다. A대표팀과의 중복 차출로 마음고생을 했다. 올림픽 예선의 경우 A매치와 달리 선수 소집 의무 규정이 없다. 유럽파는 논외였다. J-리거도 읍소를 해야 가능했다. 어떻게 변할 지 몰라 베스트 11이 없었다. 무명의 선수들로 팀을 꾸렸다. 미소는 잃지 않았다. "우리 팀은 스토리가 있다"는 말로 위안을 삼았다.
용병술은 특별했다. "난 너희들을 위해 항상 등 뒤에 칼을 꽂고 다닌다. 너희들도 팀을 위해 등 뒤에 칼을 하나씩 가지고 다녀야 한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감독이 책임진다는 메시지였다. 선수들을 향해 오로지 목표를 향해서 뛰어가라는 명령이었다. 홍명보호는 생존했다. 조 1위로 런던올림픽 티켓을 거머쥐었다.
"군대를 안 가면 내가 대신 가겠다"는 말로 박주영의 병역 연기 논란을 잠재웠다. 홍정호(제주) 장현수(FC도쿄) 한국영(쇼난 벨마레)가 부상으로 잇따라 낙마했다. 시련은 있지만 쉼표는 없었다. 그 날이 왔다.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 싸우겠다." 꿈에 그리던 런던올림픽의 막이 올랐다. 사상 세 번째로 8강 진출에 성공한 홍명보호는 런던에서 한국 축구의 역사를 바꿨다. 축구종가 영국을 격침시키고 사상 첫 올림픽 4강 신화를 이룩했다.
홍 감독이 걸어온 길에 재미난 이력이 있다. 10년 주기로 한국 축구를 뒤흔든 기적을 일궈냈다. 1992년 처음으로 줄기를 바꿨다. 1991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드래프트에 참가하지 않고 군에 입대했다. 1992년 포철(현 포항)에 입단, K-리그에 데뷔했다. 23세의 어린 나이지만 그는 달랐다. 포철의 철벽 수비라인을 이끌며 팀의 우승을 일궈냈다. 신인상과는 격이 맞지 않았다. 프로축구 사상 처음으로 신인 선수가 MVP(최우수선수)에 오르는 영예를 누렸다.
10년이 흐른 2002년 현역 시절의 꽃이 만개했다. 월드컵은 늘 두려운 무대였다. 긴장감과 압박감에 시달렸다. 2002년 한-일월드컵이 피날레 무대였다. 그러나 승선까지 굴곡의 연속이었다. 거스 히딩크 감독은 '선수 길들이기'에 달인이다. 33세 최고참 홍명보도 덫에 걸렸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 만큼 혹독했다.
다행히 그 벽을 넘어 최종엔트리에 이름을 올렸다. 주장 완장도 그의 몫이었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앞세워 월드컵 첫 승(폴란드와 조별리그 1차전 2대0 승)에 이어 4강 신화를 연출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감독 홍명보의 시대다. 2012년 런던올림픽은 그를 위한 무대였다. 감독 홍명보, 그의 이름은 찬란했다.
김성원 기자 newsme@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