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감독 홍명보 그의 이름은 찬란했다.

김성원 기자

기사입력 2012-08-05 06:52


◇홍명보 감독 런던=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d

"이 길이 내가 걸어야 할 길이라면 피하고 싶지는 않다. 선수 시절 쌓아놓은 명예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받아들이겠다."

2005년 지도자의 길로 들어선 그의 출사표다. 홍명보 올림픽대표팀 감독(43), 그는 한국 축구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1990년 이탈리아 대회를 필두로 4회 연속 월드컵 무대에 섰다.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신화가 피날레였다.

미래가 탄탄대로였다. 은퇴 후에는 차근차근 행정가 수업을 받았다. 돌발변수가 생겼다. 2006년 독일월드컵을 앞두고 당시 베어벡 코치를 앞세운 아드보카트 감독이 끈질기게 구애했다. 결국 두 손을 들고 현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온갖 시샘으로 가득했다. 지도자 자격증이 문제가 됐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는 감독 후보 1순위였지만 "초등학교 감독도 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대표팀을 이끄느냐"는 비아냥거림이 쏟아지면서 결국 낙마했다.

우여곡절 끝에 2009년 감독 홍명보 시대가 열렸다. 20세 이하 청소년대표팀을 이끌었다. 우려는 여전했지만 훌륭한 첫 단추로 잠재웠다. 그 해 이집트에서 열린 국제축구연맹(FIFA) 청소년월드컵에서 8강 신화를 연출했다. 구자철(아우크스부르크) 김영권(광저우 헝다) 김보경(세레소 오사카) 윤석영(전남) 오재석(강원)등 한국 축구 미래들이 세상에 나왔다. 'Never Stop(절대 멈추지 않는다)', 'Let's make a history(역사를 만들자)'가 그의 철학이었다.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은 두 번째 도전이었다. 희비의 쌍곡선을 그렸다. 기대가 실망으로, 다시 희망으로 바뀌었다. 금메달 외에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병역 혜택이 걸린 금메달 중압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정신적 부담은 발을 무겁게 했다. 결승 진출 문턱인 4강전에서 아랍에미리트를 만나 연장 혈투를 치렀지만 끝내 좌초했다. 0대1로 무릎을 꿇었다.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휘감았다. 반전은 또 있었다. 이란과의 3~4위전은 그의 시계를 다시 돌렸다. 1-3으로 뒤진 후반 33분 갱없는 드라마가 연출됐다. 와일드카드(23세 초과 선수)박주영(아스널)이 골문을 열었다. 이어 지동원(선덜랜드)이 후반 43분과 44분 릴레이 포를 작렬시키며 극적으로 역전승을 거뒀다. 11분간의 쇼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홍 감독은 헌신을 다한 박주영과 뜨겁게 포옹했다. "대회 전에는 금메달이 아니면 의미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15~16년 동안 축구를 했지만 후배들이 나에게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한 무엇인가를 깨우쳐 줬다. 축구를 떠나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다." 홍명보호의 주소였고, 박주영의 감격이었다. 모두가 2012년 런던올림픽을 기약했다. 사나이들의 약속이었다.

7회 연속 올림픽 본선 진출은 순탄치 않았다. A대표팀과의 중복 차출로 마음고생을 했다. 올림픽 예선의 경우 A매치와 달리 선수 소집 의무 규정이 없다. 유럽파는 논외였다. J-리거도 읍소를 해야 가능했다. 어떻게 변할 지 몰라 베스트 11이 없었다. 무명의 선수들로 팀을 꾸렸다. 미소는 잃지 않았다. "우리 팀은 스토리가 있다"는 말로 위안을 삼았다.

용병술은 특별했다. "난 너희들을 위해 항상 등 뒤에 칼을 꽂고 다닌다. 너희들도 팀을 위해 등 뒤에 칼을 하나씩 가지고 다녀야 한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감독이 책임진다는 메시지였다. 선수들을 향해 오로지 목표를 향해서 뛰어가라는 명령이었다. 홍명보호는 생존했다. 조 1위로 런던올림픽 티켓을 거머쥐었다.


"군대를 안 가면 내가 대신 가겠다"는 말로 박주영의 병역 연기 논란을 잠재웠다. 홍정호(제주) 장현수(FC도쿄) 한국영(쇼난 벨마레)가 부상으로 잇따라 낙마했다. 시련은 있지만 쉼표는 없었다. 그 날이 왔다.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 싸우겠다." 꿈에 그리던 런던올림픽의 막이 올랐다. 사상 세 번째로 8강 진출에 성공한 홍명보호는 런던에서 한국 축구의 역사를 바꿨다. 축구종가 영국을 격침시키고 사상 첫 올림픽 4강 신화를 이룩했다.

홍 감독이 걸어온 길에 재미난 이력이 있다. 10년 주기로 한국 축구를 뒤흔든 기적을 일궈냈다. 1992년 처음으로 줄기를 바꿨다. 1991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드래프트에 참가하지 않고 군에 입대했다. 1992년 포철(현 포항)에 입단, K-리그에 데뷔했다. 23세의 어린 나이지만 그는 달랐다. 포철의 철벽 수비라인을 이끌며 팀의 우승을 일궈냈다. 신인상과는 격이 맞지 않았다. 프로축구 사상 처음으로 신인 선수가 MVP(최우수선수)에 오르는 영예를 누렸다.

10년이 흐른 2002년 현역 시절의 꽃이 만개했다. 월드컵은 늘 두려운 무대였다. 긴장감과 압박감에 시달렸다. 2002년 한-일월드컵이 피날레 무대였다. 그러나 승선까지 굴곡의 연속이었다. 거스 히딩크 감독은 '선수 길들이기'에 달인이다. 33세 최고참 홍명보도 덫에 걸렸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 만큼 혹독했다.

다행히 그 벽을 넘어 최종엔트리에 이름을 올렸다. 주장 완장도 그의 몫이었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앞세워 월드컵 첫 승(폴란드와 조별리그 1차전 2대0 승)에 이어 4강 신화를 연출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감독 홍명보의 시대다. 2012년 런던올림픽은 그를 위한 무대였다. 감독 홍명보, 그의 이름은 찬란했다.
김성원 기자 newsme@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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