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주영 전 의무팀장, 60세에 외친 '브라보 마이 라이프'

하성룡 기자

기사입력 2012-04-08 15:31


최주영 전 A대표팀 의무팀장. 허상욱 기자 wook@sportschosun.com

그가 손을 대면 선수들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손가락으로 헤집다 아픈 부위를 찾아내면 인정 사정 볼 것 없이 누르고 비빈다. 대표팀의 약손이자 아픈 선수들의 몸과 마음까지 치료해주는 태극전사의 '어머니'는 24시간 선수들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은 태극전사가 그라운드에 쓰러질 때 뿐. 쏜살같이 나타나 짧은 치료를 끝내고 벤치에 사인을 보낸다. 겉으로는 빛나지 않는 대표팀의 '언성 히어로(Unsung Hero)', 최주영 대표팀 의무팀장(60)이다. 대표팀 최장 스태프였던 그가 지난 2월, 18년간의 A대표팀 트레이너 생활을 접었다. 1982년 카타르 배구대표팀 트레이너 경력까지 더하면 무려 30년 가까운 세월을 대표팀에서 보낸 '장인'이나 다름 없다. 그는 한국대표팀과 총 4번의 월드컵, 4번의 아시안게임(1982년은 카타르 대표팀으로 참가), 4번의 올림픽을 함께 했다. A대표팀은 그의 보살핌과 함께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신화를 비롯해 2010년 남아공월드컵 원정 사상 최초 16강의 업적을 이뤄냈다. 2012년 그는 대표팀을 떠나 또 다른 인생을 펼치고 있다. 스포츠재활 클리닉을 열어 일반선수들에게도 '손가락 마법'을 펼치고 있다. 지난 6일 서울시 강동구에 위치한 최주영 스포츠재활 클리닉에서 최주영 원장을 만났다. 60세에 맞은 제2의 인생을 통해 그는 '행복'을 노래했다.

히딩크는 아직도 내 이름을 모른다

그의 기억이 바로 대표팀의 역사다. 18년동안 A대표팀의 최장수 스태프로 일한만큼 감독들과 선수들의 알려지지 않은 비하인드 스토리도 가득했다. 가장 잊지못할 대회는 4강 신화를 이뤄낸 2002년 한-일월드컵. 그러나 그는 4강 신화보다 거스 히딩크 감독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별명'이 이들의 친분을 두텁게 했다. 작은 키에 더벅머리의 최 원장. 그를 처음 본 히딩크 감독은 대뜸 "아메리칸 인디언 스타일"이라고 말했단다. 이후 최 원장의 별명은 '인디언 추장'에서 '인디'까지 진화를 거듭했다. 2002년 미국 전지훈련에서 히딩크 감독은 인디언들이 머리에 꽂는 깃털까지 선물해줬다. 고트비 코치는 인디언 주술사의 지팡이까지 선물했단다. 최 원장은 지난해 히딩크 감독이 방한했을 때 궁금증이 생겼다. '과연 히딩크 감독이 내 이름을 알까.'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물었더니 히딩크 감독이 멈칫했다. 히딩크 감독의 머릿속에 그의 이름은 없었다. 최 원장은 "내가 네덜란드에 가면 가이드도 해주고 자주 식사도 하는데 이름을 부른 적이 없어서 물어봤다"며 "덕분에 나는 대표팀에서 '인디'로 불렸다. 히딩크 감독은 원래 선수들도 별명을 붙여 부른다"고 웃었다. 10년이 지난 현재도 히딩크 감독은 그를 '인디'라고 부른다.

어리광은 기성용이 최고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는 두 종류다. 안타깝거나, 웃기거나. 아직까지 애처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선수는 황선홍 포항 감독이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을 앞두고 가진 중국과의 평가전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선홍이가 그때 중국 골키퍼와 충돌한 뒤 쓰러져 십자인대가 파열됐다. 선홍이와 얘기도 나누지 못한채 혼자 속앓이를 했다. 그때 그 감정을 절대 잊지 못한다. 아직도 내가 나의 역할을 다 못해줬다는 미안한 마음만 크다." 몸 이상으로 다쳤을 선수의 마음이 더 큰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된 계기다. 그래서 그는 선수들의 마음까지 치료해주는 '치료사'가 되기를 자처했다. 반면 그를 웃게 만드는 이는 기성용(셀틱)이다. 아들뻘 되는 선수의 어리광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단다. 그는 "성용이는 대표팀이든 셀틱에서든 조금만 아파도 어린아이처럼 전화를 해서 자주 물어본다. 내가 본 선수 중 어리광이 가장 심하다"고 밝혔다. 최근 허벅지 뒷근육(햄스트링)을 자주 다치는게 안타까운 듯 "매일 마사지 받는 것 빼먹지 말고 허벅지 뒷근육 보강 운동도 꼭 해라"라는 조언을 잊지 않았다.


최주영 전 A대표팀 의무팀장. 허상욱 기자 wook@sportschosun.com
제2의 인생, 또 다른 꿈을 꾸다

"대표팀 트레이너 생활은 나를 버려야 할 수 있는 일이다. 1년이 365일이 아닌 400일 이상되는 것 같았다. 내가 그 일이 좋았기 때문에 버텨왔다." 스포츠재활 클리닉을 연 이후 더 바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최 원장의 클리닉 입구에 적혀있는 '나는 뼛속부터 트레이너'라는 문구가 60세에 시작한 새로운 인생을 이끄는 좌표다. 그는 "현장에서 뒤죽박죽 머릿속에 넣은 것을 학문화시켜 후배를 양성하고 싶다. 재활 트레이너의 길을 걷는 후배들에게 길잡이가 돼줄 것이다"고 덧붙였다. 5~6년 후에는 스포츠재활 전문 대학원 설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장학재단을 설립해 축구선수와 재활 트레이너 꿈나무를 도울 구상도 하고 있다. 아직은 시작 단계다. 전문 대학원 설립의 꿈을 위해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하고 있다. "나도 학문적으로는 무식하다. 그래서 매일 공부를 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내 꿈이 있기 때문에 더 정력적으로 일하고 있다." 을지대에서 강의하며 가장 많이 하는 말도 '브라보'란다. 젊은 시절 정열과 꿈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그의 얼굴에 끊이지 않는 웃음처럼 '행복'한 '브라보 인생'이 시작됐다.
하성룡 기자 jackiechan@sportschosun.com



:) 당신이 좋아할만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