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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조선 김표향 기자] 라디오 DJ 형준(박용우) 앞에 편지 한통이 도착한다. 보낸 이의 이름은 23년 전 첫 사랑 수옥. 형준이 떨리는 손으로 봉투 속 노트를 펼치면, 1991년 그 여름의 바닷가가 손에 잡힐 듯 되살아난다.
다리가 불편해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수옥은 수술 받아 걸을 수 있기를 소망한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건에 희망은 부서지고, 다섯 친구는 오해와 다툼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낸다. 여름의 끝자락에서 그렇게 그들은 첫 사랑과 이별한다.
영화 '순정'은 순수해서 더 저릿한 성장통처럼 관객의 가슴을 뻐근하게 만든다. 티 없이 맑았던 그때 그 마음을 너무 오래 잊고 살았던 걸까. 영화를 보면서 틈틈이 지난 추억을 떠올리다 진한 그리움에 살며시 웃음 짓게 되는 순간이 여러 번 찾아온다.
캐릭터에도 치장이 없다. 즐겁고 화나고 설레고 슬픈, 그 모든 감정이 눈빛과 행동으로 드러난다. 캐릭터를 따로 떼어놓으면 조금은 단조롭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다섯이 어우러지면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며 조화를 이룬다. 너무 순진해서 동화처럼 느껴지는 순간마저도 그들의 해맑음에 마음의 빗장을 풀게 된다.
범실 역의 도경수는 미묘한 변화만으로도 상대를 설득하는 깊은 눈빛을 가졌다. 수옥 역의 김소현은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라 불러도 좋겠다. 맛깔스러운 연기를 펼친 이다윗과 자신의 몫을 똑부러지게 해낸 주다영, 듬직한 존재감을 보여준 연준석은 빛나는 발견이다. 황석정, 박정민, 이대연 등 연기파 조연도 감칠맛을 더한다. 무엇보다 영화 속 배우들의 표정과 움직임이 무척 자연스럽다는 게 인상적이다. 실제 친분이 영화에 고스란히 담긴 듯하다.
영화는 간결하지만 여운이 긴 단편소설 같은 분위기다. 소설을 영상으로 옮긴 'TV 문학관' 같기도 하다. 전남 고흥 바닷마을의 수려한 풍광도 마치 소설 속 묘사처럼 서정적으로 다가온다. 아니나 다를까. 소설가 한창훈의 자전적 단편소설 '저 먼 과거 속의 소녀'가 원작이다. 책장을 하나하나 넘기듯 영화 속 한 장면 한 장면에 눈길이 멈춘다.
강수지의 '보랏빛 향기', 무한궤도의 '여름이야기', 아일랜드 민요 'The Water is Wide' 등 배경음악들은 추억 여행을 이끄는데, 극중 김소현이 부르는 '보랏빛 향기'가 특히 좋다.
깊은 밤 수옥의 방에서 불이 꺼질 때까지 담장 밖을 서성이는 범실의 모습, 그리고 다리 아픈 수옥을 차례로 업고 다니는 네 친구들의 모습이 왠지 부러워서 극장문을 나선 뒤에도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온다. 고흥 앞바다를 물들인 석양빛처럼 포근하게 마음을 덥혀주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12세 관람가. 24일 개봉. suzak@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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