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 변요한에게서 제일 눈에 띈 건, 뜻밖에도 새치였다. 5대 5 가르마 헤어스타일. 그 사이에 설핏하게 눈에 띄는 새치. 젊은 남자 배우에게서 처음 보는 그 흰색 머리카락이 그렇게 멋스럽고 자연스러워 보일 줄은 몰랐다. 가볍게 톡 뽑아내도 될 텐데, 그는 시원스러운 웃음을 얹어 이렇게 말했다.
"변요한이라는 사람이 스스로 즐길 수 있는 상황에선 자연스럽게 흥을 타죠.(웃음) 하지만 사람들에게 휩쓸려서 들뜨고 싶진 않아요. 그동안 나름대로 묵묵히 연기해 왔고 그 과정에서도 충분히 즐거웠거든요. 드라마가 잘 돼서 사랑받는 게 감사한 마음이지만, 그렇다고 엄청 흥분되고 그런 건 아니에요."
'미생'의 변요한을 보면서 어디서 저런 배우가 벼락처럼 나타났는지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았다. 능청스럽고 쾌활해 자칫 가벼워보이지만 업무 능력 출중하고 속 깊은 의리파 한석율 캐릭터를 팔딱팔딱 생동감 있게 표현해 냈다. 내게도 한석율 같은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리고 누군가에게 그런 친구가 되고 싶다는 생각, 많이 했다.
한석율의 '멋'을 연기해낸 변요한의 '멋'을 일깨워 주고 싶었다. 그런데 쑥스러운 화답 대신 손사래가 돌아온다. 칭찬은 감사하지만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설명도 함께.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으면 아쉬운 점은 없었는지 꼭 물어본다. "그게 변요한이라는 사람이 살아온 방식"이라고 했다. "오래오래 연기하고 싶어요. 훗날 언젠가 좋은 배우라는 얘기를 들을 때까지 열심히 작품 연구를 하면서 제 자리를 지켜야죠. 초심을 잃지 않도록 저를 붙들어 주고 지혜를 주는 분들이 제 곁에 많았으면 좋겠어요."
물론 간혹 주변 얘기에 솔깃할 때도 있단다. 그때마다 냉정해지려 한다. 동안이란 얘기를 들은 날, 매니저에게 '몇 살처럼 보이냐'고 물었더니 '스물일곱 정도'라는 답이 돌아와 괜히 아쉬웠다는 에피소드를 털어놓는다. "쓸데없는 욕심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나 자신을 끊임없이 점검해야 합니다." 그래야 오래 연기할 수 있다는 확고한 원칙. "아직도 한참 배워야 할 나이에요. 선배는 물론이고 또래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서도 배워요. '미생'을 하면서 이경영, 손종학, 이성민 선배를 존경하게 됐어요. 왜 그분들이 오랫동안 연기할 수 있었는지 알게 됐죠. 이성민 선배가 '잘했다', '사랑한다'고 메시지를 보내주셨는데, 그 애정과 감사함에 보답할 수 있는 자랑스러운 후배가 되고 싶어요."
배우로 출발선상에 서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중국 유학을 떠났고 2년 뒤 아버지가 불러서 한국에 돌아왔더니 '입대 영장'을 선물로 받았다. 제대 후엔 몰래 연극영화과 입시를 준비하다가 아버지에게 들통이 났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입학을 내건 아버지의 조건부 허락. 배우의 꿈은 참 어렵게 변요한을 찾아왔다.
"아버지가 저의 끈기와 열정을 시험해 보신 것 같아요. 마치 오차장이 장그래에게 '날 홀려봐'라고 했듯이 말이에요. 배우라는 직업이 만만치 않다는 걸 아시니까요. 지금은 너무나 감사해요. 한예종이란 학교를 알려주신 분도, 휴학 중에 독립영화에 출연해 보면 어떠냐고 조언해주신 분도 아버지세요. 쉽게 연기하지 말라고, 빠른 길이 아니라 바른 길로 가라는 말씀을 잘 새기고 있습니다."
'미생'은 끝났고 변요한은 우리나이로 서른 살이 됐다. 다음 행보를 물으니 "한석율이 성장했듯 변요한도 어른을 준비하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지금은 너무 힘들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고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어요. 이 감정을 하나하나 풀어보면서 문득 궁금해졌어요. 나중에는 어떤 감정을 갖게 될지. 그 감정을 작품 안에 어떻게 담아낼지에 대해서요. 그게 무엇이든 좋은 에너지였으면 좋겠어요."
김표향 기자 suzak@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