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조선

장르의 원류를 찾아서 (5). 악마의 게임 디아블로, 정통과 혁신의 시대

이덕규 기자

기사입력 2015-01-26 16:31


악마의 게임 '디아블로'의 등장

1995년과 1996년은 서양식 RPG 팬들에게 가장 혹독한 해였다. 대작이라 불릴만한 RPG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서 베데스다 소프트웍스의 '엘더스크롤2: 대거폴'이 그나마 체면치레를 했다. 광활한 맵에서 정해진 스토리 대신 게이머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탐험할 수 있는 '대거폴'은 기존의 RPG와는 다른 특이한 면모로 주목 받았다. 베데스다 소프트웍스는 몇 년 지나지 않아 RPG의 거물로 떠오르게 된다.

한편 1996년 12월 말,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형식의 RPG가 등장했다. 바로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의 '디아블로'다. '디아블로'의 개발과정은 이례적인 RPG였다. 게임을 기획했던 개발자(콘도르, 후의 블리자드 노스)들도 처음에는 'X-COM'같은 턴 방식의 전투를 모델로 삼았다. 이 당시 RPG에서 턴 방식 전투는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으로 주가를 올리던 블리자드 본사는 '디아블로'의 기획안을 보고 '워크래프트' 시리즈 같은 실시간 전투를 사용하라고 요구했다. 이 요구로 블리자드와 '디아블로'의 개발팀인 콘도르는 마찰을 빚었다. 블리자드와 옥신각신 하던 개발자들은 '실시간 전투 RPG가 얼마나 바보 같은지 보여주겠다'며 단 몇 시간 만에 '디아블로'의 프로토타입을 제작했다.


실시간 RPG의 혁신을 가져온 디아블로
콘도르의 창업자인 데이비드 브레빅은 임시로 완성된 '디아블로'의 프로토타입을 시연했다. 어두침침한 던전 안에 칼을 든 전사와 커다란 해골전사가 서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브레빅은 마우스로 해골전사를 클릭했다. 전사가 알아서 해골전사 쪽으로 이동하더니 칼을 휘둘러서 해골을 박살냈다. 기존의 RPG에선 보기 힘든 느낌의 전투였다. 그는 "이야, 끝내주는데!"라고 외쳤고 그 순간 '디아블로'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블리자드 본사의 결정은 옳았다. 턴 방식의 전투 대신 마우스 클릭으로 벌이는 '디아블로'의 실시간 전투는 게이머를 열광시켰다. 전사, 마법사, 도적 중 하나를 골라 클릭으로 적을 두들겨 패는 전투에서 PC에서만 맛볼 수 있는 '손맛'이 느껴졌다. 신화에 등장하는 악마들이 대량으로 등장하는 잔혹한 풍경의 어두침침한 던전도 '디아블로' 인기의 한 요인이었다.

PC게임에서 서서히 인기를 얻고 있던 '멀티플레이' 요소도 '디아블로'에 적극적으로 도입되었다. '디아블로' 정품을 구매한 사람은 전용 멀티플레이 서비스인 '배틀넷'에 접속해 다른 게이머와 모험을 즐길 수 있었다. 느린 템포의 턴 방식이 아니라 실시간 전투였기 때문에 멀티플레이의 가치는 한층 더 빛났다.

북미-유럽 시장에서 '디아블로'는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 '디아블로'는 '정통' RPG를 벗어나 액션 RPG라는 새로운 장르를 본격적으로 개척했다. 이전까지의 RPG는 묵직한 스토리를 즐기는 마니아를 겨냥하고 있었다. 반면 '디아블로'는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게임을 추구했다. 던전을 탐험하고, 적을 죽이고, 레벨업하고, 더 좋은 장비를 얻는다는 디아블로의 '가벼운' 컨셉은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데 큰 역할을 했다.


'폴아웃'과 '발더스게이트', 서양식 RPG의 부활

'디아블로'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정통' 방식을 추구하는 서양식 RPG 팬들에게는 뭔가 부족했다. 일부 RPG 팬들은 '디아블로처럼 얄팍한 게임은 RPG도 아니다'라는 혹평을 내리기까지 했다. 1995년과 1996년의 괴멸적 시기를 거치면서도 좀 더 크고, 묵직한 '정통' RPG를 바라는 팬의 목소리는 그대로였다.

이런 마니아들을 구원할 RPG가 등장했다. 인터플레이의 '폴아웃'(1997)과 바이오웨어의 '발더스게이트'(1998)이었다. '폴아웃'은 핵전쟁으로 황폐화 된 22세기의 미국을 배경으로 한 RPG다. 전설적인 고전 RPG '웨이스트랜드'(1988)의 사실상의 후속작이다. 다만, 이 당시 '웨이스트랜드' 상표권을 EA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웨이스트랜드2'라는 이름은 붙이지 못했다

본래 '폴아웃'은 TRPG 룰인 'GURPS'를 라이선스 하여 개발하려 했었다. 하지만 라이선스 문제가 불거지면서 인터플레이는 캐릭터에 능력치를 부여하는 시스템인 'SPECIAL'을 '폴아웃'에 적용했고 이는 '폴아웃' 시리즈의 상징이 된다. CRPG에서 TRPG와 유사하게 전투 외의 방법(흥정, 설득, 협박…)으로 퀘스트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이 '폴아웃'을 돋보이게 했다.


정통 RPG를 부활시킨 발더스게이트
이듬해인 1998년에는 바이오웨어의 '발더스게이트'가 등장했다. TRPG 'Advanced Dungeons & Dragons'의 세계관을 기반으로 제작된 게임이다. 본래 SSI가 AD&D의 판권을 가지고 PC게임을 찍어냈지만 90년대 중반 라이선스를 반납했고 이를 기반으로 한 PC게임도 거의 명맥이 끊어진 상태였다.

'발더스게이트'는 AD&D 포가튼 렐름 세계관을 기반으로, 살인의 신 '바알'에 관련된 존재인 '바알스폰'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 게임은 바이오웨어가 자체 제작한 인피니티 엔진을 사용했다. AD&D 룰에 기반한 실시간 전투지만 언제든지 일시 정지하고 다음 행동을 지정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방대하고 잘 짜인 '발더스게이트'의 모험 이야기는 판타지 마니아와 게이머 모두를 만족시켰다. TRPG의 룰을 PC게임에 맞게 잘 응용한 점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무조건 자유도를 주는 것이 아니라 NPC를 죽이고 소매치기를 하는 등 다양한 일을 저지를 수 있지만 책임은 모두 캐릭터 자신이 져야 한다. 동료끼리도 가치관에 따라서 서로 티격태격 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오랜만에 등장한 '정통' RPG에 게이머는 열광했다. 게임스팟, CGW 등 거의 모든 게임언론이 '1998년 올해의 게임', '1998년 최고의 RPG'에 선정할 정도였다. 이야기와 게임성 모두를 잡은 '발더스게이트'는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시리즈를 통틀어 500만장 넘는 판매량을 기록했다.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 주인공의 정체성을 찾아간다는 심오한 스토리로 많은 팬들을 확보했다
혹독한 겨울을 지내던 서양식 RPG는 '폴아웃'과 '발더스게이트'를 계기로 다시 봄을 맞았다.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1999)는 철학적인 질문이 담긴 방대한 이야기로 '문학에 버금가는 작품'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2000년 에는 AD&D 기반의 경쾌한 전투가 중심인 '아이스윈드 데일', '발더스게이트'의 후속작인 '발더스게이트2'가 등장해 인기를 얻었다. 한 때 게임 시장에 명함도 내밀지 못하던 '정통' RPG는 그렇게 다시 한 번 부활했다.

'MMORPG' 시대의 개막

한편 이 시기 새로운 RPG 장르가 싹을 틔웠다. 바로 사용자간의 상호작용을 기반으로 하는 MMORPG(Massively Multiplayer Online Role-Playing Games)다. 기원이 되는 MUD(Multi-User Dungeons)까지 따지면 1970년대 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MUD는 'Zork'나 '로그'를 기반으로 PC통신에 접속해 커맨드 입력으로 RPG를 즐기던 방식이었다.

1990년 초 RPG 열풍과 PC통신의 보급에 힘입어 미국에서 최초의 MMORPG가 출현했다. AOL에서 서비스하던 '네버윈터 나이츠'(1991)다. TRPG D&D 룰을 기반으로 제작된 이 게임은 필드 사냥과 길드 시스템, PvP까지 갖춘 본격적인 MMORPG였다. 접속 시간에 비례해 요금을 지불하는 종량제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다.

'네버윈터 나이츠' 이후 꽤 많은 MMORPG가 나왔다. 최초의 3D MMORPG라 할 수 있는 '메리디안 59'가 1995년 등장했고, 한국에서는 '바람의 나라'가 1996에 등장해 호평을 받는다. 그리고 1997년에는 본격적으로 'MMORPG'라는 장르를 내세운 게임이 등장했다. '울티마 온라인'이다.


울티마 온라인, MMORPG의 원조격 작품
'울티마 온라인'은 게임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울티마' 시리즈의 강점이던 자유도가 온라인에 그대로 구현되어 있었다. '울티마' 시리즈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른 시민을 죽이거나, 잠긴 문을 따고 침입해서 도둑질을 할 수 있었다. 평화롭게 음식을 만들어 팔거나 광물을 채집할 수도 있었다. '울티마' 시리즈와 다른 점은 '다른 시민'이 NPC가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이 조종하는 캐릭터였다는 점이다.


3D MMORPG 시대를 몰고 온 에버퀘스트
1999년에는 3D MMORPG '에버퀘스트'가 등장했다. 에버'퀘스트'라는 제목에 걸맞게 매우 중독성 있는 퀘스트, 게이머간의 상호작용, 보스몹 레이드 등을 주 요소로 내세우고 있었다. 가장 큰 특징은 무분별한 PvP보다는 길드나 레이드 보스 등 협동을 중시했다는 점이다. '울티마 온라인'이 (불이익을 감수한다면) 무제한의 PvP가 가능했던 반면, '에버퀘스트'는 특정 서버에서만 PvP가 가능하도록 설정되어 있었다. '에버퀘스트'는 게이머에게 '에버크랙'(크랙은 마약의 일종)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흡입력이 대단했다.

21세기를 향하여

20세기 말의 RPG 장르를 되돌아 보면 모두가 즐거웠던 시기였다. 1990년대 중반 위기를 맞았던 서양식 RPG는 다시 봄을 맞았다. 다시 매 년 '대작'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지구 반대편에서는 콘솔 게임기를 앞세운 '일본식 RPG'가 거대한 제국의 힘을 과시하고 있었다. 미국과 한국에서는 MMORPG라는 새로운 장르도 싹을 틔웠다.

마침내 21세기에 접어들었다. 모두가 밀레니엄을 맞아 축포를 쏘아 올렸다. 하지만 RPG 장르의 이야기는 끝이 아니다. 초고속 인터넷망과 차세대 콘솔 게임기 대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운 세기를 맞아 RPG 장르는 또 다시 변혁을 겪는다. 그 변혁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김경래 게임어바웃 기자 www.gameabou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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