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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시네마 리뷰] 태생 다른 두 영웅의 정체성 고민

임정식 기자

기사입력 2011-06-21 12:59 | 최종수정 2011-06-21 12:59





[박근영의 영화본심/그린랜턴&엑스맨] 초여름 극장가에 마블 돌연변이와 DC 영웅이 활동 중이다. <엑스맨>과 <그린랜턴>이다. 마블의 돌연변이 초능력자들은 핵전쟁을 막고 DC의 초록색 전사는 우주괴물을 막는다. 둘 다 만화 원작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다. 그러나 다른 점이 많다. 활동무대와 능력뿐만 아니라 태생과 갈등, 주요 감정이 다르다.

<엑스맨:퍼스트 클래스>는 돌연변이 지도자 프로페서 X(찰스)와 매그니토(에릭)가 다른 노선을 택하는 이유를 다룬다. 이전 시리즈보다 과거의 이야기를 다룬 프리퀄이다. 액션의 오락적 요소보다는 <엑스맨> 시리즈의 정치적, 문화적 정체성을 업그레이드 했다. 전체를 은유로 보자면 철학적이기도 하다. <그린랜턴:반지의 선택>은 결점 많은 인물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우주 전사가 되는 과정을 다룬다. 새로운 시리즈의 시작이다. 개인적 문제와 감정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수미쌍관식 액션 시퀀스는 깔끔하다. 보는 동안 머리 쓸 일은 거의 없다.




둘은 태생부터 다르다. 엑스맨은 다른 유전자를 타고났다. 일반인과 확실히 구분되는 외모나 능력이 있다. 그러나 차이는 차별의 표적이 된다. 에릭이 유대인이어서 인종청소의 대상이 되는 것, 미스티가 자신의 파란 피부를 계속 감추는 것, "법은 인간에게 적용되지 돌연변이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는 대사 등은 주류에서 제외된 인종, 약자, 소수 민족 등에 그대로 적용된다. 엑스맨의 갈등은 이렇다. '타고난 것 때문에 우리가 왜 버림받아야 하나?' 이 갈등에서 나오는 핵심감정은 고통과 분노다. 매그니토가 가진 파괴적 초능력의 원동력이다.

반면 평범한 중산층인 <그린랜턴>의 할은 '별 볼일 없는 내가 왜 선택됐나?'가 갈등이다. 부상당해 죽어가는 외계인을 보고도 "초록색 피가 있는 병원에 데려다 주겠다"고 말하는 할은 다르다는 것이 상처가 되거나 위협이라는 생각도 없다. 심지어는 오아 행성에 가서 몸에 돌연변이 유전자를 심고 온다. 그러나 나약한 할은 그린랜턴 전사가 되는 것도 포기한다. 개인 속에 함몰된 무책임한 포기의 달인 할의 핵심 감정은 두려움이다. 우주악당이 가진 파괴력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해결책도 다르다. <엑스맨>은 집단적 사회적 맥락에서 포용과 공존을 강조한다. 프로페서 X의 입장이다. 한편 <퍼스트 클래스>에서 프로페서 X는 유전학과 심리학 복수 전공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돌연변이들이 심리적 문제를 극복해서 자신의 초능력을 최적화할 수 있도록 돕는 방식은 심리상담을 떠오르게 한다. <그린랜턴>은 개인적 심리적 맥락에서 개인의 용기와 의지를 강조한다. 그린랜턴 군단의 군인정신이기도 하다. 시스템도 무기도 아닌 한 개인의 정신력에 지구의 명운을 걸다니, 두려움 없는 의지야 말로 올 마이티 최강 로또일까?

<그린랜턴>은 반지를 통해 개인의 잠재력을 최대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초인적 정신력으로 무얼 하려는 걸까? 아마도 "의지가 약해"라는 말은 기성세대가 새로운 세대를 보면서 가장 많이 하는 말 중 하나일 것이다. 또한 "용기 있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라"는 말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하는 대표적 메시지 중 하나다. 이런 의미에서 <그린랜턴>의 할은 보수적인 DC 캐릭터의 성격을 띤다. 절친, 여친, 적, 아무한테나 정체를 들키는 할은 어리버리한 영웅이다. 그러나 현실의 아버지(최고 조정사)와 상징적 아버지(그린랜턴 최고전사 이반슈르)의 임무를 자신의 것으로 수긍하면서 비로소 할이 성인이 되는 이야기는, 문화를 전수하고 기존질서를 지키는 아버지 계열 영화다. 영화에서 악당 핵터가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악인으로 완성되는 것은 <그린랜턴>에서 선악이 무엇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린랜턴>에 비해서 <엑스맨>은 영화 내내 선과 악에 대해 논쟁적 태도를 보인다. 집단 이익이나 개인적 이유에 따라 시시각각 변할 수 있는 선이 어떤 의미인가를 묻는다. 프로페서 X와 매그니토가 선악이 아닌 방법론에서 결별하는 이유다. 돌연변이는 다수가 속하는 평균 범위에 결코 들어갈 수 없는 집단이다. <엑스맨>의 세상에서 다르다는 것은 생존과 현실의 문제다. 자신들의 존재를 기존 사회에서 인정받거나 혹은 기존 사회를 전복시키기 위해 연대하고 싸워야 하는 셈이다. 이들이 열심히 다른 돌연변이들을 찾는 이유 중 하나다. 차별 받는 사람들이 갖는 잃어버린 사랑과 조건 없는 인정에 대한 그리움은 매그니토가 잃어버린 어머니를 슬퍼하는 것을 통해 반복해서 드러난다. 어떤 의미에서 <엑스맨>은 어머니 계열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는 유치해 보일지 몰라도 비슷한 문제는 현실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두려움 없는 열정과 지치지 않는 의지로 잠재력을 끌어내라는 <그린랜턴> 식의 해결책은 형형색색 표지를 달고 서점가를 점령하고 있다. 생활의 조건이 엇비슷하다면 자신의 심리적 강점과 약점을 깨닫고 의지를 강화하는 것이 삶을 향상시킨다(그린랜턴). 또한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거나 바꾸는 것 외에는 다른 해결책이 없을 때도 개인의 의지는 삶을 향상 시킨다. 그러나 전혀 다른 조건에서 시스템이 없거나 오작동되는 현실적 문제가 있는 곳에서 생존해야 한다면 문제를 심리적 차원으로만 환원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엑스맨). 결국 <엑스맨>과 <그린랜턴>은 혈통이 다른 머나먼 영화다. 어느 쪽이 재미있는지는 관객 각자의 정체성이나 취향의 문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심리학 박사, 분당제생병원 정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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