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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앞만 보고 달리기에도 벅찼다. 몸이 부서질 것 같았지만, 이겨야만 했다. 농구만이 전부, 다른 건 생각조차 할 수도 없었다. 풋풋한 여고시절, 대학교 캠퍼스의 싱그러움 등은 그녀에게는 '사치'였다. 그래도 버틸 수 있던 건 가슴 한쪽에 빛나던 태극마크 때문이었다.
14학번 박찬숙의 아름다운 도전
50대 중반에 대학 신입생이 됐다.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총장 이동관) 사회체육과 14학번이다. 박 부회장은 "안녕하세요. 저 14학번 박찬숙입니다"라며 인사를 건넸다. 뒤늦게나마 배움의 길을 다시 걷게된 것에 대한 기쁨과 설렘이 가득 담긴 그녀의 목소리. 정말로 스무살짜리 대학교 신입생처럼 명랑하게 울렸다.
박 부회장은 "농구가 그때는 전부였죠. 국가대표로서 나라의 명예를 지키려면 무조건 이겨야 했어요. 공부에 따로 시간을 내는 게 불가능하던 때였어요"고 말했다. 그렇게 농구에 매진한 결과 '선수' 박찬숙은 무수히 많은 영광을 품에 안았다.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 금메달, 그리고 1984년 LA올림픽 은메달. 이는 한국 구기종목 사상 올림픽에서 처음으로 따낸 메달이었다.
1985년 현역에서 은퇴하고 난 뒤에는 더 바빠졌다. 지도자가 되어 후배들을 가르쳐야 했고, 결혼도 했다. 그리고 2005년부터 2009년까지는 대한체육회 부회장을 맡아 스포츠 행정가로 또 다른 변신을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학문에 대한 아쉬움은 계속 박 부회장의 마음을 무겁게 하곤 했다. 하지만 딱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체육계와 여성스포츠계에서 계속 활동하면서 주로 실무 파트를 맡았어요. 사람들을 만나 일을 추진하는 데에는 자신이 있었죠. 하지만 전문적인 행정업무와 관련해서는 계속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죠. 내가 모르는 부분을 채우지 않으면 자신감마저 잃을 것 같았거든요"
결국 박 부회장은 용기를 냈다. 대학교에 입학해 학위를 받기로 한 것이다. 박 부회장은 "합격 통보 문자를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꼭 소풍가기 전날의 아이처럼 기분이 설레고 좋았어요. 딸보다 어린 동기들과 한번 신나게 공부해보렵니다"라며 새내기의 각오를 밝혔다.
두 명의 멘토, 박찬숙의 용기에 달개를 달다
사실 박 부회장이 다시 배움의 길에 접어들 수 있던 데에는 주변의 도움이 컸다. 깊어져가던 고민을 들은 뜻밖의 '두 멘토'가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한 것이다. 장본인들은 바로 이동관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 총장과 김경숙 한국체대 대학원장이다. 박 부회장은 "김 선배와 지난해 후반기에 여성스포츠계 쪽의 일로 얘기를 나누던 때였어요. 내가 늘 학업에 대해 아쉬워한다는 걸 털어놓자 김 선배가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학위에 도전하라'는 권유를 하셨어요"라며 만학도의 꿈을 이루게 된 계기를 밝혔다.
"저 혼자서는 힘들어요." "내가 도와줄게." 박 부회장은 김 교수가 하는 말을 듣고, 반신반의했다고 한다. "그냥 말로만 도와주신다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김 선배님은 정말 적극적으로 도와주셨어요. 추진력이 정말 대단하셨어요. 그렇게 학교와 연결이 된 거에요."
두 번째 도움의 손길은 이동관 총장이 내밀었다. "이 총장님과는 2012년 런던올림픽 때 인연이 있어요. 제가 훈련캠프 단장을 맡게 됐는데, 당시 청와대에 계셨던 이 총장님이 보이지 않게 많은 힘을 실어주셨습니다. 굉장히 멋있는 분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이번에도 화끈하게 도와주셨죠."
박 부회장이 대학 입학을 타진할 당시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의 총장 자리는 공석이었다. 그런데 새로 부임한 이 총장은 '박찬숙'이라는 이름을 듣고, 적극적으로 입학을 돕는 한편, 박 부회장을 아예 대학의 홍보대사로 임명했다. 뒤늦게 배움의 길에 접어든 그녀의 용기가 학교의 이미지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이제 박 부회장은 새로운 도전을 한다. 스포츠 행정가로서의 기초가 될 학문을 쌓는 일이다. 그녀는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는 기분이 들어요. 요즘 '100세 시대'라고 하잖아요. 그럼 남은 50년을 위해서 새로 공부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죠"라며 늦깎이 대학생이 된 점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녀의 목표. 예나 지금이나 한국 스포츠와 여성스포츠 발전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배움의 길에 새로 섰다. "이젠 용기가 나요. 남들도 하는 거, 저라고 못하겠습니까"라며 용기와 희망의 기운을 전하는 박찬숙. 그녀의 용감한 도전에 박수를 보낸다.
이원만 기자 wma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