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크엔드스토리] 히어로즈 투수 잔혹사로 본 토종 4선발의 가치

나유리 기자

기사입력 2017-05-04 22:43


(왼쪽부터)한현희-최원태-조상우-신재영. 스포츠조선DB

국내 선발진을 만들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다. 넥센 히어로즈의 토종 투수 역사를 살펴보면 '인고의 시간'을 짐작할 수 있다.

시즌 초반 넥센이 마주친 첫 번째 암초는 흔들리는 선발 로테이션이다. 앤디 밴헤켄-션 오설리반-신재영-최원태-오주원으로 5선발을 꾸렸지만, 현재 로테이션에 남아있는 선수는 신재영과 최원태 둘 뿐이다.

1선발로 기대를 모았던 오설리반은 부진 끝에 3일 퇴출됐고, 오주원은 선발로 3경기에 나와 2패-평균자책점 7.20을 기록하고 불펜으로 보직을 변경했다. 밴헤켄은 어깨 불편함을 호소해 지난달 26일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됐다. 곧 돌아오겠지만, 외국인 투수 없이 경기를 치르고 있다.

위기 때 기회가 온다고 했던가. 국내 선발 투수들이 맹활약을 해주기 시작했다. 부상에서 복귀한 한현희, 조상우가 선발로 입지를 굳히고 있고, 유망주 최원태가 씩씩하게 공을 뿌리면서 한층 성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신인왕' 신재영도 소포모어 징크스 없이 충실히 로테이션을 지키고 있다. 국내 투수 4명의 약진. 넥센으로선 감격스러운 성과다.

그렇게 기다리던 토종 10승

넥센은 2008년 구단 출범 후 확실한 국내 선발 투수를 키워내지 못했다. 이유가 있었다. 현대 유니콘스로부터 넘어온 좋은 자원들이 많았지만, 창단 초기 트레이드나 FA(자유계약선수)를 통해 이적한 선수가 많았다. 두산 베어스에 있는 이현승과 고원준, 삼성 라이온즈 장원삼이 창단 초기 넥센을 대표하는 투수들이었다.

이미 자리를 잡은 투수들이 팀을 떠나고, 유망주들은 생각대로 빨리 커주지 않았다. 문성현과 강윤구(현 NC 다이노스) 등 대형 유망주들에게 기대를 걸었으나 선발로 자리잡기는 쉽지 않았다. 조상우 한현희가 필승조로 성장하면서 불펜은 어느 팀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만큼 튼튼해졌으나, 선발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당연히 토종 10승 투수도 보기 힘들었다. 선발 투수에게 10승이란, 자신의 역할을 평균 이상 수행했다는 상징적인 수치다. 절대적 기준은 아니어도 '10승 투수'라는 타이틀이 가진 힘이 있다.


넥센은 2009년 이현승이 13승10패를 기록한 후 2015년까지 6시즌 동안 국내 10승 투수를 배출하지 못했다. 2012~14시즌 외국인 투수들이 20~30승을 합작할 때, 국내 투수들은 대부분 5~6승에 그쳤다. 2014년 문성현이 9승4패를 기록한 게 가장 근접한 승수였다.

드래프트에서 유망주들을 선택하고, 등판 기회를 줘도 선발 자리를 꿰차는 투수는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염경엽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던 2013~2016시즌 넥센은 리그 최고의 타선을 가지고 있었다. 박병호(미네소타 트윈스), 강정호(피츠버그 파이어리츠), 유한준(kt 위즈)을 중심으로 공포의 홈런 군단을 꾸렸다. 이런 막강한 타선을 갖추고도 우승을 하지 못했던 이유는 국내 선발진 때문이었다. 넥센은 2014시즌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고도 준우승에 머물렀다. 당시 상대팀이었던 삼성과 국내 투수에서 실력차가 컸다. '에이스' 밴헤켄이 당시 정규리그 20승을 거두며 최전성기를 보냈지만, 혼자 힘으로는 버거웠다.

한현희, 조상우의 선발 전환 프로젝트

사이드암 한현희와 우완 강속구 투수 조상우는 넥센의 필승조였다. 마무리 손승락(롯데 자이언츠)과 더불어 승리 요원으로 넥센의 뒷문을 책임졌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봤을 때, 좋은 공을 가진 두 사람이 선발 투수로 전환을 해야한다는 구단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한현희는 2015시즌부터 선발로 나서기 시작했다. 전반기에 승운이 따르면서 수월하게 승수를 쌓았지만, 아직 불완전했다. 결국 후반기부터 다시 불펜으로 보직이 변경됐다. 그해 한현희는 11승4패의 성적을 남겼다. 11승 중 선발로는 8승을 거뒀다.

그러나 시즌을 마치고 4주 기초 군사 훈련을 받기 위해 훈련소에 들어갔던 한현희가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을 결심했다. 꾸준히 불편함이 있었던 팔꿈치의 근원적인 통증을 해소하기 위해서다. 수술 대신 재활을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도 있었지만, 본인의 뜻이 확고했고 수술대에 올랐다.

조상우는 2016시즌을 앞두고 선발 전환을 시작했다. 그러나 2월 스프링캠프 연습경기 등판 도중 통증이 생겼다. 결국 한현희에 이어 조상우도 수술대에 올랐다. 주두골 피로 골절 핀 고정술과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을 받았고, 두 사람은 2016시즌 통째를 재활로 보냈다.

한현희와 조상우는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재활을 했다. 궁극적인 목표는 선발 등판. 2017시즌 중 선발 투수로서의 복귀를 목표로 삼고 착실히 재활 절차를 밟아나갔다. 다행히 경과가 좋았다. 두 사람 모두 예상보다 빨리 돌아올 수 있었다. 한현희는 개막 엔트리부터 합류했고, 조상우도 비슷한 페이스였다. 오히려 구위는 조상우가 더 빨리 살아났지만, 2군에서 선발로 등판 경험을 쌓은 후 4월 중순 1군에 등록됐다.

두 사람은 복귀 후 꾸준히 로테이션을 소화하고 있다. 한현희는 아직 승리가 없지만, 모두 5이닝 이상을 던졌다. 조상우 역시 첫 선발 등판에서 시즌 첫승을 거둔 후 2경기 연속 5이닝 1실점 호투했다. 출발이 좋다. 넥센 코칭스태프는 여름이 되면 두 사람의 페이스와 구위가 더 좋아질 것이라 기대를 걸고 있다.

신재영의 등장, 넥센 국내 투수의 새 역사

현재 넥센이 국내 선발 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지난해 '센세이션'을 일으킨 신재영의 등장 덕분이다. NC에서 트레이드로 이적해 경찰에서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신재영은 지난해 15승7패-평균자책점 3.90을 기록하고 신인왕을 차지했다.

넥센 구단 창단 후 처음으로 탄생한 국내 15승 투수다. 동시에 2009년 이현승의 13승을 뛰어넘은 팀내 최다승 투수로 영광을 누렸다. 지난해 넥센이 정규 시즌 3위라는 성적을 낼 수 있었던 것도, 신재영의 맹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구 좋은 사이드암 투수는 팀의 역사까지 바꿔놨다.

올 시즌 역시 훨씬 발전된 모습이다. 지난해 신재영은 아직 풀타임 경험이 없고, 투구수를 많이 소화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올해는 이닝에도 욕심을 냈다. 최근 등판한 3경기에서 각각 7이닝, 8이닝, 7이닝을 던지는 등 선발진의 중심을 잘 잡아주고 있다.

2015년 1차 지명으로 입단한 최원태도 잠재력을 터뜨리고 있다. 서울고 출신 최원태는 입단 당시부터 '싹이 보이는 투수'로 눈도장을 찍었다. 첫 시즌은 2군에서 경험을 쌓는데 '올인'했고, 지난해 1군 17경기에 등판했지만 인상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올해는 투심 패스트볼 장착과 필요없는 구종은 버리고 확실한 카드들만 쥐고 가면서 6경기 3승3패의 성적을 거두고 있다. 6회 이전에 강판된 경기가 한 차례도 없다. 특유의 씩씩하고 공격적인 투구로 어떻게든 이닝을 끌고나가는 재주가 있다. 경기 초반 실점을 하더라도 무너지지 않는다. '형들'보다 더 돋보이는 점이다.

국내 선발 4명, 이렇게만 해준다면

넥센은 현재 오설리반에 밴헤켄까지 빠진 상황에서도 조금씩 팀 성적을 회복하고 있다. 밴헤켄이 복귀한 후 국내 선발들의 활약이 계속된다면, 마운드에 한층 안정감이 생긴다. 야수진이 워낙 탄탄해 선발이 확실하다면, 치고 나갈 힘이 생긴다.

장정석 감독은 여름의 승부수를 기다리고 있다. 넥센은 지난해에도 다른 팀들이 지치는 여름에 더 강했다. 고척돔을 홈 구장으로 쓰는 이점이기도 하다. 반격을 위해서는 4인 국내 선발의 지금같은 활약이 반드시 필요하다.


나유리 기자 youll@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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