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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곳팀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선수, 저니맨(Journeyman). 한국 프로야구에서 저니맨하면 금방 떠오르는 이름이 최익성(45)이다. 이력을 몇줄로 정리하기 어려울 정도로 참 많이 돌아다녔다. 1994년 삼성 라이온즈에 연습생으로 입단해 한화 이글스, LG 트윈스, KIA(해태) 타이거즈. 현대 유니콘스 유니폼을 차례로 입었다. 2004년 삼성으로 돌아왔다가, 2005년 다시 SK 와이번스로 옮겼다. 6차례 이적해, 6개팀에서 뛰었다. 당시 두산 베어스, 롯데 자이언츠 빼고 전 구단을 경험했다.
사실 프로에서 12시즌을 뛰었으니 성공한 야구 인생이다. 통산 621경기에 출전해 통산 타율 2할6푼7리-60홈런-216타점. 1997년엔 122경기에 나가 2할9푼6리-142안타(7위)-22홈런(7위)-33도루(5위)-65타점-107득점(2위)-61볼넷(8위)을 기록했다. 가장 빛났던 그해 '20(홈런)-20(도루)'까지 달성했다. 그런데도 워낙 이적이 잦다보니 실패로 보는 시선이 있다. 최익성은 그 시절을 돌아보며 "한 번도 아니고 트레이드가 이어지니까, 나중엔 겸허하게 받아들이게 되더라"고 했다.
선수 꿈을 완전히 접은 그는 저니맨 야구육성사관학교를 만들어 선수를 육성했는데, 독립구단 저니맨 외인구단 창단을 준비하고 있다. 기존의 독립구단 연천 미라클, 팀 구성에 나선 파주 챌린지와 함께 독립리그 출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선수시절 만큼이나 특별한 길이다.
20일 스포츠조선 회의실에서 마주한 최익성은 "이적한 팀에 인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뿌리가 깊은 선수가 아니다보니, 트레이드 카드로 자주 나온 것 같다. 독립구단은 누군가 해야할 일인데 선뜻 나서는 야구인이 없어 하게 됐다"고 했다.
-저니맨스포츠그룹 대표에 야구육성사관학교 대표, RJ컴퍼니 대표, 은퇴선수협회 사업총괄본부장이고, 독립구단 출범까지 준비하고 있다. 도대체 직함이 몇개인가.
RJ컴퍼니는 내가 만든 출판사다. 내 야구인생을 정리해보려고 쓴 '저니맨'과 건강관련 책, 두 권을 냈다. 2005년 SK 와이번스에서 나왔는데, 야구를 완전히 포기한 게 아니었다. 2년간 미국과 대만, 멕시코에서 테스트를 받았다. 비용은 집 팔고 차 팔아 댔다. 그 때 프로 생활하면서 조금 벌어둔 돈을 다 썼다. 야구를 완전히 그만두고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2008년부터 잠시 노숙자처럼 지냈다. 2년 넘게 소득세 신고할 게 없었고, 은행 대출도 못 받았다. 30대 중후반의 나이에 남의 집, 창고에서 자면서 5,6개월을 보냈다. 주위에서 보험해봐라, 고깃집 열어주겠다, 용품 팔아봐라, 이런 제의가 많았다. 뭘 해야할 지 고민하다가 2008년 말 우연히 드라마 출연 기회가 생겼다. MBC 미니시리즈 '2009년 외인구단'을 찍을 때 윤태영 등 출연자들을 지도를 하게 됐다. 출연해보자는 제의가 있어 얼떨결에 탤런트 데뷔를 했다. 수많은 팀을 떠돌았으니 모두가 실패했다고 했다. 그 때는 한 곳에서 정년퇴임하고, 돈 많이 버는 게 성공의 기준이 아니었나. 내가 걸어온 길이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라는 걸 남기고 싶었다. 제일 밑바닥일 때 내 야구인생을 정리하고 싶어 책을 냈다. 책은 이승엽이나 박찬호나 쓰는 게 아니냐는 비아냥도 있었다. 초판 3000부 찍어 어느 정도 소화했다. 돈 벌려고 낸 책이 아니었다. 다시 성공해 '저니맨 2'를 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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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연예계로 계속 가지 않고 야구쪽으로 돌아왔나.
2009년엔 드라마 오디션 보러다녔다. 1년 해보니 두번째 인생의 승부를 걸만한, 올인할 바닥이 아니었다. 올인하기에 늦기도 했지만, 연예계에 가짜가 많았다.(웃음) 오디션 보러가면 감독, 조감독이 웃으며 '진짜 탤런트할 거냐'고 묻더라. 오디션 가면 따로 불러 예우를 해 준적도 있지만, 쉽지 않았다.
-정말 프로팀 지도자는 생각 안 해봤나.
SK에서 나올 때, 민경삼 단장님이 지도자 준비를 하라고 했다. 그 때는 미국으로 건너가 도전하는 게 내가 갈 길이라고 생각했다. 이후에도 프로팀 오라는 얘기가 있었지만 안 갔다. 프로에 있을 때도 다른 인생을 고민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야구 시작해 연습생으로 삼성에 입단했고 여기저기를 오갔다. 아웃사이더였다. 이런 경험을 한 선수가 나말고 또 있을까. 야구계에서 (프로에 안 가고도)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저니맨' 시절을 애기를 해달라.
솔직히 이곳저곳 옮겨다닐 때는, 다른 사람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들었다. 1998년 시즌이 끝나고 한화 이글스로 트레이드 된 후 가장 오래 머문 게 1년 반 정도다. 해태 타이거즈, 현대 유니콘스에서 1년 반을 보냈다. 나머지 팀에선 1년씩 있었다. 야구에서 겪을 수 있는 모든 걸 경험한 것 같다. 2군에 있을 때는 마음이 허해 몇 시간씩 밤거리를 배회했다. 2군에서 경기, 훈련이 빨리 끝나면 할 일이 없었다. 기회가 안 주어지니 답답했다. 잠은 안 오는데 술 먹으면 몸 망가질 것 같아 안 마셨다. 답답한 심정을 누구한테 말 할 수도 없었다. 이야기를 하면 이해해주는 척 하겠지만, 결국 스스로 극복해야하는 거 아닌가.
-팀을 옮기면 새로운 분위기에 적응해야 한다. 쉬운 일이 아니었을텐데.
새 팀에 가면 다시 경쟁해 살아남아야 한다. 집도 얻어야 하고, 행정처리도 혼자 다 해야 한다. 또 서먹서먹한 분위기에 적응도 해야 한다. 7,8개월 지내다보면 혼자 갈만한 밥집이 눈에 들어오고, 커피 한잔 할 정도로 가까운 동료가 생긴다. 그런데 적응할만하면 또 이적했다. 그렇게 대전, 서울, 광주, 수원, 대구, 인천으로 옮겨다녔다.
-'저니맨'이라는 얘기는 언제 처음 나온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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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팀을 옮긴 이유가 뭔가. 구단과 불화가 많았던 건가.
성격 탓도 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소용돌이에 휩싸여 그랬던 것 같다. (1998년)외국인 타자가 들어왔고, IMF가 있었고, 프로야구선수협이 생겼고, 또 감독과 마찰이 있었다. 한화 소속이던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 후 선수협 문제로 LG 트윈스로 이적하게 됐다. LG에선 어깨 수술을 뒤로 미루고 경기에 출전해 시즌이 끝난 뒤 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홍현우가 FA(자유계약선수)로 오면서 보상선수로 해태에 가게 됐다. 당시 LG에 좋은 선수가 많은데 해태가 왜 나를 데려가나 생각했다. 코치와 트러블도 있었다. 지도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면 찍혔다. 왜 프로인데 내 주장을 못하나. 웨이트 트레이닝을 알아서 많이 해도 뭐라고 했다. 기존 틀에서 벗어나면 안 좋게 보는 이들이 있었다. 코치가 '이렇게 치라'고 하면 나는 '이렇게 하는 게 편하다'고 얘기했다. 그러면 또 찍혔다.
-이적 선수라 손해를 본 부분도 있었을 것 같다.
아무래도 나를 잘 모르니 이해를 못하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이적한 팀에 인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뿌리가 깊은 선수가 아니다보니, 트레이드 카드로 자주 나온 것 같다. 두 번은 코칭스태프와 마찰이 있어 트레이드 됐다. 한 번도 아니고 계속 트레이드가 이어지니까, 나중엔 겸허하게 받아들이게 되더라.
-굴곡이 많았던 프로 12시즌 동안 가장 소중한 기록, 기억이 뭔가.
1999년 한화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우승을 맛봤다. 그래도 1997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120경기 이상 경기에 나갔다. 너무 아쉽고 짧았지만 그 시즌이 있었기에 지금 내가 있는 게 아닐까. 야구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즌이었다.
-다른 프로야구 선수 출신들과 다른 길을 걸었다.
평생 마음이 가자는대로 움직였다. 20홈런을 치고도 타격 폼 바꾸라고 하고, 찍히면 못 나가는 게 싫었다. 사실 SK를 떠난 2005년에 컨디션이 가장 좋았다. 그해 대타로 100타석도 못 들어갔는데, 홈런 4개를 때렸다. 오승환을 상대로 홈런도 쳤다. 당시 SK 외야 멤버가 정말 좋았다. 박재홍 김재현 이진영 조원우 조경환 박재상 김강민이 있었다. 그런데도 개막전 엔트리에 들어갔다. 2006년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보류선수명단 제출 마지막 날 밤에 방출 통보를 받았다. 그때 어린 시절부터 동경하던 미국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도전, 열정의 의미가 크지만, 정말 어려운 길이다. 도움을 받거나 조언을 구했나.
혼자 짐싸서 LA로 넘어갔다. 하숙집 얻고 돌아다녔다. 야구하는데 있으면 함께 하자고 했다. 주말에 리그 있으면 찾아다녔다. 에이전트가 없이 혼자하니까 안 되더라. 시카고 화이트삭스 스카우트가 나를 보러 온 적이 있는데, 통역, 비자, 에이전트가 없어 데려갈 수 없다고 하더라. 당시 미국에 있던 이문한 삼성 스카우트가 독립구단 롱비치에 연습 좀 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함께 훈련을 하다가 좋으니까 계약을 하자고 하더라. 그런데 계약 직전에 또 비자가 문제가 됐다. 그 때 6개월 관광비자로 미국에 체류하고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테스트를 받으려고 했는데, 여러가지 상황이 안 맞았다. USC(남가주대학)에서 일주일간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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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구단 얘기로 넘어가보자. 그런데 지금 왜 독립구단인가.
단순하게 생각했다. 야구육성사관학교를 만들어 4년간 개인 육성을 했다. 프로에 4명을 입단시켰다. 시스템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 4명 모두 투수인데도 매커니즘을 극대화 했더니 좋아지더라. 프로가 되려면 기술을 가르칠 게 아니라, 기술이 나오는 과정을 가르쳐야 한다. 우리는 야구 피라미드 정점인 프로야구 밑이 너무 허약하다. 20대 초반 초반 나이에 야구를 포기해야하는 선수가 얼마나 많은가. 연천 미라클이 하는 걸 보고, 나도 할 수 있겠다 생각했다.
-선수들에게 돈을 받는 걸 안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
숙식비를 안 받으면 답이 안 나온다. 일본, 미국 독립리그 선수는 출퇴근한다. 우리는 숙식을 해야하는데, 이 비용까지 부담하면 팀 유지가 안 된다. 한국형 독립구단은 아직은 어쩔 수 없다. 돈 안 받는 구조로 가야하는데, 올해가 분기점이 될 것 같다. 일단 서울시쪽과 협의가 잘 돼 목동야구장을 확보했다. 4월 24일, 25일 독립리그 개막전이 열린다. 적은 액수라도 입장료를 받을 생각이다. 도움도 안 주면서 돈받지 말라고 하면, 독립구단은 없어져야 한다. 3억~5억원 정도면 팀 운영이 가능하다.
-연고지는 서울이 되는 건가.
강원도 춘천, 경기도 화성하고 얘기가 오갔다. 일단 서울에 연고를 두고 있지만, 서울시로부터 시설물에 대한 지원만 받는다. 이제부터 찾아야 한다. 스폰서도 마찬가지다.
-독립구단이 3개가 되면 선수 수급에 문제는 없나.
처음 시작하는 일이라 물음표가 너무 많다. 파주도 아직 트라이아웃을 한 단계다. 연천도 3월 초에 트라이아웃을 연다고 한다. 예전처럼 선수가 안 모일 수도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팀당 엔트리를 20~25명으로 정해 특정팀에 선수가 집중되지 않도록 하기로 했다. 한쪽이 부족하면 다른쪽에서 선수를 보내면 된다. 한팀이 욕심내면 모두 어려워진다.
-15명으로 선수단을 꾸려 경주에서 전지훈련을 진행중인데.
겨우내 실내훈련만 했으니, 밖에 나가 기술훈련을 해야할 때다. 경주쪽에서 많은 도움을 준다. 독립구단에 관심이 높아 유치하면 내려오겠냐고 묻는 관계자도 있다. 운동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지자체도 관심을 갖지 않겠나. 말로만 할 게 아니라 직접 뛰어야 한다. 모교 경주고 야구장과 보문야구장을 사용한다.
민창기 기자 huelva@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