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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때문에 오늘 경기가 엉망이 안 됐으면 좋겠다. 경기를 무사히 마쳤으면…."
지난해 후반기에 비디오 판독제가 도입된 후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이전에 비해 부담이 다소 줄었다고 해도 매경기, 매순간 엄청난 압박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심판양성교육이 진행중인 서울 서대문구 명지전문대 심판학교에서 김풍기 심판위원(49)을 만났다. 지난 6월 통산 2000경기를 넘어선 21년차 베테랑 김 심판은 팀장을 맡고 있으며, 오프 시즌에 심판교육 참가자들을 지도하고 있다. 김 심판을 통해 오심과 끝없이 싸워야하는 심판들의 세계를 들여다 봤다.
김 심판은 "팬이 가장 무섭다. 그분들에게 떳떳하려고, 눈 부릅뜨고 경기장에 나선다. 선수가 실책을 하는 것처럼, 우리도 그런 날이 있다. 완벽을 추구하지만 완벽할 수 없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사적인 감정과 상관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나선 경기장에 가족이 온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했다.
김응국 타구에 맞은 오른팔 후유증 3년 갔다.
잇단 오심에서 비롯된 비디오 판독제 도입. 심판 입장에서 불쾌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실시해 보니 긍정적인 면이 많다. 김 심판은 "비디오 판독을 한다고 했을 때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예전에는 누가 봐도 오심인데 번복을 할 수 없어 괴로울 때가 있었다. 이런 오심을 바로 잡을 수 있어 좋다"고 했다.
그렇다고 비디오 판독이 만능은 아니다. TV 카메라의 각도, 위치에 따라 차이가 있다. 판독 요청이 들어오면 심판조의 팀장과 해당 심판, 대기심, 경기위원 4명이 느린 TV 화면을 뜯어보고 판단을 한다. 판독 장비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오로지 TV 화면을 보고 결정을 하다보니 어려움이 적지 않다. 판독이 쉽지 않은 상황이라면 최초의 판정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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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를 쓰고 프로텍터를 착용한 구심도 늘 위험에 노출돼 있다.
"공에 맞으면 교통사고를 당한 것처럼 후유증이 심하다. 목이 아프고, 일주일 이상 몸이 찌뿌둥하다. 타구가 안면을 강타하면 마스크 휠이 휠 정도로 충격이 크다. 이런 마스크는 경기가 끝나면 페기처분한다. 공에 맞을 위험이 있고, 공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김 심판은 한해에 마스크를 2~3개 바꾼적이 있다고 했다. 경험이 적은 저연차 심판이 공을 좀 더 잘 보려고 자세를 높게 가져갈 때가 있는데, 그만큼 부상 위험이 크다고 한다. 김 심판은 "심판 초기에 김응국이 때린 공에 연속으로 오른쪽 팔을 맞은 적이 있다. 후유증이 3년쯤 간 것 같다"며 웃었다.
니퍼트의 직구, 장원삼의 슬라이더, 류제국의 싱커가 최고.
매년 새로운 투수가 등장하고, 준비가 필요하다. 투구 동작부터 견제 동작, 투구 성향, 제구력, 구종까지 낯설다보니 더 신경을 쓰게 된다. 스프링캠프 종료 직후에 심판들은 전지훈련 기간에 수집한 신인 투수, 새 외국인 투수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의견을 교환한다. 김 심판은 "내가 보크를 의심한다고 해서 다른 심판이 똑같이 보는 건 아니다. 오승환이 처음 프로에 왔을 때 발을 내딛는 동작을 놓고 논란이 있었다. 굉장히 답답한 상황에서 메이저리그에 자문을 구해 문제가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고 했다.
심판마다 스트라이크 규정 안에서 고유의 스트라이크존을 갖고 있다.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쉽게 변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스트라이크존을 일관성 있게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김 심판은 "컨트롤이 좋은 투수는 문제가 안 되는데, 영점을 잡지 못하고 들쭉날쭉하면 주심의 스트라이크존까지 무너질 수 있다. 손민한같은 제구력 투수가 나오면 편하다"고 했다. 투구 템포가 빠른 외국인 투수도 리듬을 타기 좋아 군더더기 없이 경기를 진행할 수 있다고 한다.
투수들이 던진 공을 세밀하게 관찰하는 심판이 봤을 때, 최고의 공을 던지는 선수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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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가 주연, 조연을 배려하면 더 빛난다.
공 한개, 판정 하나가 경기 흐름을 바꿔놓을 수 있다. 판정에 선수가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한다. 김 심판은 대다수 선수가 매너가 좋다면서, 박병호(넥센 히어로즈) 김재호(두산) 나성범(NC 다이노스)을 매너가 좋은 대표적인 선수로 꼽았다. 다만, 펄쩍 뛰면서 큰 동작으로 비디오 판독을 요청하는 선수를 보면 아쉽다.
"선수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어차피 비디오 판독을 하는 건데 요란한 동작을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그런 모습은 상대를 존중하는 자세가 아니다. 간결하게 의사를 표해도 감독이 충분히 인지한다. 심판이 선수를 존중해야하지만, 선수도 심판을 존중해줘야 한다. 선수가 주연이라면 우리는 조연 정도다. 조연을 존중해주는 주연은 더 빛날 수가 있다."
그는 이어 "'국민타자', '국민투수'로 불리는 선수를 봐야 한다. 억울하더라도 조금 자제를 하면 더 멋져 보이지 않을까. 심판이 죽을 죄를 지은 게 아니지 않나. 선수가 요란한 동작을 하면 팬이 동요한다. 팬을 선동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다른 리그에서는 용서가 안 되는 동작이고, 퇴장 사유가 될 수도 있다"고 했다.
김 심판은 이승엽(삼성)이 통산 400홈런을 때린 경기를 떠올렸다. 이승엽은 지난 6월 3일 포항구장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전에서 상대 투수 구승민을 맞아 우월 홈런을 쳤다. 이승엽은 홈런을 때린 후 세리머니없이 그라운드를 빠르게 돌았다. 당시 루심으로 있었던 김 심판은 "그런 게 배려이고 존중이다. 이승엽이 괜히 '국민타자'가 아니었다"고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를 시작한 김 심판은 40년 가까이 야구와 함께 했다. 하면 할수록 어려운 게 심판이지만, 굉장히 매력적인 직업인 것 같다고 했다. 팬들이 가득찬 경기장에서 식전 행사가 모두 끝나면, 모든 이들이 주심의 경기 시작 '콜'을 기다린다.
가슴 한쪽이 뻥 뚫린 듯 허할 때가 있다. 한국시리즈가 끝난 직후다. 김 심판은 "방금전까지 치열한 승부가 펼쳐지고 있었는데, '위 아더 더 챔피언스(We are the champions)'가 흘러나오고, 우승팀 선수들이 환호하면서 헹가래 치는 걸 보면, 이방인이 된 듯 허무하다. 이럴 땐 빠르게 경기장을 빠져나간다. 한편으로는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에 소주 생각이 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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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프로 종목에서 심판이 구단으로부터 돈을 받은 사실이 알려져 충격이 컸다. 심판의 불안정한 입지, 낮은 처우가 원인이라는 얘기가 들린다. 다른 종목에서는 선수가 심판을 비하하는 행동을 해 눈살을 지푸리게 했다. KBO리그 심판은 다른 종목에 비해 신분이 안정적이다. 김 심판은 "4~5년 전에 계약직에서 근로자 신분으로 바뀌었다. 60세까지 정년이 보장되는데, 다른 데로 눈을 돌릴 이유가 없다"고 했다.
김 팀장은 KBO에 들어온 후 시즌 중에 구단 관계자와 식사를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우연히 식당에서 만나더라도 오히려 돈을 다 내주고 나온다고 했다. 예전에는 해외 전지훈련 기간에 구단이 심판진에 식사를 대접할 때가 있었다. 구본능 총재가 KBO 수장이 된 후 이런 관행까지 모두 없앴다고 한다. 오해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KBO는 경찰 출신들로 암행감찰반을 꾸려, 심판뿐만 아니라 프로야구 전체를 체크하고 있다.
시즌 종료 후 3박4일간 심판 전체가 모여 워크숍을 진행한다. 한 시즌 동안 이뤄진 판정을 돌아보는 자리다. 타 종목 심판 관계자를 초청해 강연을 듣기도 한다. 2월 초 전지훈련지로 떠나기 전 또 3박4일 동안 준비의 시간을 갖는다. 김 심판은 "보통 18일 정도 전지훈련지에 머무는데, 15경기 정도 심판을 본다"고 했다.
높아진 야구 위상과 함께 심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올해 심판양성교육에 총 213명이 신청했다. 10주간 일반과정, 5주간 전문과정, 두 가지 코스가 있다. 10주 일정을 기준으로 매주 금요일 오후에 4시간, 토요일과 일요일에 각각 6시간씩, 총 160시간 동안 교육을 받는다. 전체 시간의 10%인 16시간 이상 미출석시 실격처리 된다. 김호인 심판학교 교장은 "여의사, 군인까지 다양한 직종의 신청자가 교육을 받고 있다"고 했다. 김 심판은 "몇 년 전 야구 마니아 신부님도 참가해 끝까지 과정을 마쳤다"고 했다.
선수 출신 중에서 성적 우수자를 대한야구협회가 채용한다. 아마추어 심판경력을 쌓은 후 KBO 심판 응시가 가능하다. 매년 KBO는 1~3명의 심판을 채용하고 있다. 2군에서 평균 7년 정도 경력을 쌓아야 1군 승격이 가능하다. 매년 1군 심판들에 대한 고과 평가가 이뤄진다.
민창기 기자 huelva@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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