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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석] 골든글러브 유감, '팬에 대한 감사'는 어디있나

이원만 기자

기사입력 2014-12-10 08:09


올 시즌 프로야구 포지션별 최고의 선수를 선정하여 시상하는 '2014 프로야구 골든글러브 시상식'이 9일 오후 서울 삼성동 코엑스 오디토리움에서 열렸다. 수상자들이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밴헤켄, 박병호, 강정호, 서건창, 나성범, 김평호(최형우 대리), 손아섭, 이승엽, 박석민, 양의지(대리).
10개 부문 포지션별 황금장갑의 주인공은 올 시즌 프로야구를 취재, 중계한 미디어 관계자를 대상으로 12월 1일부터 5일까지 실시한 투표로 선정됐다.
정재근 기자 cjg@sportschosun.com/2014.12.09/

"팬 여러분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프로야구 선수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시즌 중 '히어로 인터뷰'를 할 때나 연말 시상식에서 큰 상을 받았을 때. 선수들은 늘 '팬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는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팬이 없는 프로선수는 있을 수 없다. 사실상 '100억 FA시대'가 열릴 수 있던 것도 프로야구 팬들의 관심과 성원이 컸기 때문이다. 선수들은 팬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해야 한다.

하지만 그 말에 진정성을 담은 선수는 과연 얼마나 될까. 진정 팬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면, 그에 걸맞는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 행동이 없는 "팬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는 그저 빈말일 뿐이다. "다음에 밥 한번 먹자"와 전혀 다를 바 없다.

그런 면에서 지난 9일 서울 코엑스 오디토리움에서 열린 2014 골든글러브 시상식은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몇 가지 장면을 보자.

장면 1. 소년은 끝내 울지 않았다

시상식이 본격적으로 열리기 약 20여 분 전. 행사장에 미리 입장한 선수들은 각자 자리에 앉아 주위 동료들과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 모습을 향해 사진 기자들이 플래시 세례를 퍼붓던 어느 순간, 야구모자를 쓴 한 소년이 선수들의 자리로 조심스레 들어왔다. 행사 시작 전 어수선한 틈을 타 안전요원의 눈길을 용케 피했나보다.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던 A선수에게 다가온 소년이 쥐어짜듯 말했다. "저…사인 좀". 간신히 용기를 냈는지 소년의 목소리는 작았다. 우렁우렁한 행사장 소음을 이길 수 없었다. 다행히 불쑥 내민 사인볼을 본 A선수가 소년과 눈을 맞췄다. 사인과 미소를 주고 받는 장면을 상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A선수는 멀뚱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소년은 금세 다가온 안전요원에 의해 일반 팬석으로 돌려보내졌다. 워낙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A선수의 반응도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당황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년의 부탁을 들어주는 데 단 10초면 충분했다. 만약 A선수가 "잠시만요"라고 안전요원을 제지한 뒤 소년에게 10초만 내줬다면 어땠을까. 사인도 못받고 돌아서야 했지만, 소년은 울지 않았다. 단지 고개만 푹 숙였다.

장면 2. 오빠는 결국 오지 않았다

이날 골든글러브 시상식의 선수석. 유난히 빈자리가 많았다. 전체 43명의 후보 중 시상식에 참석한 선수는 겨우 20명. 참석률이 겨우 46.5%다. 국내 선수 중에서는 38명 중 19명이 불참했다. 이전에도 후보 선수가 개인 사정으로 불참하는 경우는 더러 있었다. 하지만 '후보자 참석률 50%'는 매우 이례적이다.

반면 일반팬석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올해 골든글러브 행사장에 일반팬 400명을 초청했다. 지난 2일 오전 10시부터 KBO 홈페이지를 통해 선착순으로 200명(1인당 2매)의 신청을 받았다. 순식간에 동이 났다. 그만큼 야구팬의 기대와 성원이 크다는 증거.

입장권을 얻지 못했어도 팬들은 행사장에 몰렸다. 매서운 추위쯤은 안중에도 없었다. 자기가 응원하는 스타를 가까이서 보고, 사진이라도 찍고, 운 좋으면 사인 하나쯤 받고 싶은 마음. 그런 소소한 꿈에 부풀어 추위도 잊은 듯 했다. 하지만 이런 팬들의 절반쯤은 이날 헛고생만 했다. 하염없이 기다려도 끝내 안 나타난 선수가 절반이 넘었다.

행사가 시작된 뒤, 1층 로비에서 스마트폰 사진 폴더를 열어보던 한 여성팬은 이렇게 푸념했다. "원래는 B선수 팬인데, 결국 다른 선수들 사진만 찍었어요. 오빠가 결국 안오셨네요…"

프로야구 선수들이 "팬에 대한 감사"를 말하면서도 행동으로 표현하는 데는 익숙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팬에 대한 보답, 쉬운 것부터 하자

대부분 선수들이 여전히 "좋은 성적으로 팬에게 보답하겠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성적은 연봉에 대한 선수의 의무다. 받은 만큼 실력으로 보여주는 게 당연하다. 팬에 대한 보답은 성적과 별개다. 오히려 경기장 안팎에서 팬을 진심으로 배려하는 행동이 진정한 보답이고, 감사의 표시다.

쉬운 것부터 하면 된다. 팬은 선수의 사소한 행동에도 감동받는다. 사인 요청을 흔쾌히 받아주는 것, 다정한 눈인사, 따뜻한 말 한마디. 이런 것들이 홈런보다 중요할 때가 있다. 사인을 못 해주는 상황이라면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 수상 여부와 상관없이 자신을 보고싶어하는 팬을 위해 멋진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 전부 팬에 대한 보답이자 프로다운 행동이다.

구단이 일반 샐러리맨은 꿈도 못꾸는 고액 연봉을 선수들에게 주는 데에는 그런 모습을 보여달라는 뜻도 담겨있다. '100억 FA시대'에 이런 행동은 더 중요해졌다.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 후보였던 LG 박용택은 이런 말을 했다. "뻔히 상을 못받을 걸 알지만, 그래도 일부러 신경써서 차려입었습니다." 박용택이 단순히 옷맵시 자랑하려고 이런 수고를 했을까. 그건 아니다. 팬에 대한 보답은 결코 멀리있지 않다.


이원만 기자 wman@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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