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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판 영호남의 정권 교체인가.'
프로야구 팬들은 1986년 해태 구단버스 방화사건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10월22일 밤 삼성과 해태의 한국시리즈 3차전이 열린 날이었다. 5대6으로 석패한 것에 분개한 일부 대구 팬들이 난동을 부리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는 영-호남 지역감정이 극심한 정치·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해 사회적 이슈로 비화됐고, 한국 프로야구 31년사에 최악의 관중 소요사건으로 기록됐다.
당시 한국시리즈에서 해태는 4승1패를 거두며 삼성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이른바 '해태왕조'의 시대가 형성되고 있던 시기였다.
이를 계기로 삼성과 해태는 야구 뿐만 아니라 프로 스포츠 전체를 통틀어 지역 라이벌의 대표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공교롭게도 양 팀의 상징동물 사자(라이온즈)와 호랑이(타이거즈)는 정글과 숲속의 황제다. 동물원이 아니면 자연의 세계에서는 잘 만날 일이 없는 두 동물이 야구판에서 대리전을 펼치는 것이다.
모기업 해태그룹이 몰락하고 KIA로 주인이 바뀌었어도 '타이거즈'라는 영원 불멸한 명칭과 선수단, 구단 프런트를 고스란히 계승했다. 때문에 현 KIA에도 해태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처럼 삼성과 KIA의 치열한 라이벌 구도가 새로운 주기를 보이고 있어 흥미롭다. 1980∼1990년대가 KIA의 시대였다면 2000년대 들어서는 확연한 삼성의 시대인 것이다.
삼성은 30일 KIA전에서 승리하면서 올시즌 9승1패의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다. 올시즌 팀간 경기수는 총 16차례. 남은 경기를 KIA가 모두 이긴다고 하더라도 이미 삼성의 우세승이다.
KIA는 올시즌 삼성과 함께 우승후보로 거론됐지만 4강 포스트시즌 진입도 불투명한 상황이다. 30일 현재 두산과의 승차가 2.5게임인 점을 감안하면 삼성전에서 반타작만 했더라도 이렇게 고전하지 않을 수 있었다.
삼성의 우세는 올시즌 뿐만이 아니다. 삼성이 이처럼 KIA 상대 우위를 보이는 것이 벌써 4시즌째다. 2008년 9승9패였던 균형 구도가 깨지면서 KIA가 통산 10번째 우승을 차지하던 2009년 13승6패로 우위를 점했다.
하지만 2010년부터 12승7패-12승7패(2001년)-12승1무6패(2012년)로 4년 연속 삼성의 우세로 자리잡았다.
삼성이 KIA를 상대로 연속 시즌 우위를 보인 것은 이번 뿐만 아니다. 1990년대를 거쳐 2000년 초반으로 이어질 때도 그랬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 5시즌 연속으로 삼성이 KIA 앞에서 강했다. 물론 KIA가 강했던 시절이 있었다. 1983∼1984년, 1986년, 1988∼1991년 등이 그랬다.
1982년 프로야구를 시작한 이후 32년째를 맞은 올시즌까지 삼성과 KIA의 대결에서 우위를 점한 시즌을 따로 떼놓고 보면 16승3무13패로 삼성이 우위였다. 통산 페넌트레이스 승패 결과는 삼성이 295승12무270패였다.
공교롭게도 현 KIA 사령탑은 지난해부터 지휘봉을 잡은 KIA의 전설 선동열 감독이다. 선 감독에게 삼성은 지도자로서 친정팀이나 다름없다. 2004년 말부터 2010년까지 삼성을 이끌다가 류중일 감독에게 지휘봉을 넘겨준 이후 삼성 징크스에 걸린 형국이다.
흥미로운 점은 선 감독이 삼성에 부임할 때는 오히려 KIA 킬러였다. 2005∼2010년 6시즌 동안 2008년 9승9패, 2009년 6승13패를 제외하고는 KIA에 밀려 본 적이 없었다. 이때 선 감독은 2005, 2006년 2연속 통합우승을 지휘했다.
선 감독의 스승이자 원조 KIA의 전설인 김응용 감독이 지휘했던 삼성의 2001∼2004시즌에도 KIA에 상대적 열세를 기록한 것은 2003년(5승2무12패) 한 번 뿐이었다. 김 감독 역시 삼성 지휘봉을 잡는 동안 2001년 페넌트레이스 우승, 2002년 통합우승을 안겨줬다. 삼성으로 갔을 때에는 제1의 친정팀에 비수를 꽂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 포스트시즌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삼성은 KIA의 밥이었다. 페넌트레이스에 잘해놓고 포스트시즌으로 넘어갔다 하면 영락없이 당한 것이다.
역대 삼성과 KIA가 포스트시즌에서 만난 것은 총 4번이다. 플레이오프 1번, 한국시리즈 3번이었다.
이 가운데 삼성이 승리한 것은 1990년 플레이오프 3전승, 1차례 뿐이다. 한국시리즈에서 모조리 실패했다.
'방화사건'이 일어난 1986년(1승4패)를 비롯해 1987년 한국시리즈(4패), 1993년 한국시리즈(2승1무4패)가 그랬다. 포스트시즌 통산으로은 KIA가 13승1무 6패로 압도적인 우위다.
큰 무대에만 가면 KIA 앞에서 약했던 삼성이 김응용-선동열 체제에 이어 지난 2시즌 연속 통합우승을 달성하는 등 2000년대 들어 확고한 '삼성천하'를 구축한 것이다. 다만 이 기간 동안 삼성은 포스트시즌에서 아직 KIA를 만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삼성은 최근 들어 KIA에 왜 강한 것일까. 삼성 관계자는 "삼성은 전통적으로 어느 특정팀을 상대로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경쟁심을 주입하지 않는다"면서 "삼성이 KIA에만 강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어떻게 시간이 흐르다보니 객관적인 전력에서 KIA가 강했던 시절이 삼성으로 바뀌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삼성 류중일 감독은 "나도 선수 시절에 해태(현 KIA)에 많이 당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이는 나를 비롯한 당시 삼성 소속 선수들의 이야기일 뿐이고, 지금 우리 선수들까지 그런 걸 의식할 리가 있겠느냐"면서 "KIA는 삼성이 상대하는 8개팀 중 하나일 뿐이지 특정팀을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요즘 삼성 선수들 분위기를 보면 과거 해태 전성기의 파이팅 의식과 피가 흐르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승부욕이 뜨거웠던 호랑이 전통의 피가 사자에게 전이됐다는 의미다.
KIA는 아직 포스트시즌의 희망이 있다. 삼성과 큰 무대에서 만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들의 영호남 권력구도가 어떻게 전개될지 벌써부터 흥미롭다.
광주=최만식 기자 cms@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