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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입견에 발목을 잡힌 꼴이다.
마무리 전환설 나올 때마다 '불합격' 판정 받았던 봉중근
봉중근은 한국무대 첫 시즌이었던 지난 2007년부터 마무리와 선발을 두고 코칭스태프에게 고민을 안겼다. 김재박 전 감독은 이리저리 테스트를 해보다 결국 시범경기에서 우규민에게 마무리 보직을 맡겼다. 김 전 감독은 2009시즌 전 스프링캠프 때도 봉중근의 마무리 기용을 검토했다 포기했다. 지금의 봉중근을 보면 가장 속이 쓰릴 이가 아닐까.
LG는 개막 전 마무리를 외국인선수 리즈에게 맡겼다. 160㎞에 이르는 강속구를 뿌리는 리즈는 확실히 마무리로서 매력적인 카드였다. 하지만 정작 리즈는 마무리라는 보직의 압박을 견뎌내지 못했다.
두번째 선택은 재활중인 봉중근이었다. 당초 불펜 복귀를 목표로 1이닝씩 재활등판을 하고 있었지만, 이 등판이 자연스레 마무리 전업으로 이뤄졌다. 봉중근은 승승장구했다. 6월22일 잠실 롯데전에서 첫 블론세이브에 분을 못 이기고 소화전을 내리치기 전까진.
비록 팀 성적이 곤두박질 치는 단초를 제공했으나 봉중근은 마무리 잔혹사를 끊은 히어로가 됐다. LG는 선발투수 1명을 잃었지만, 미래를 위해 적극적으로 새 얼굴들을 기용했다. 군복무를 마친 류제국이 시즌 뒤 계약이 가능하고, 정찬헌도 소집해제되는 등 내년 시즌 가용자원은 더욱 늘어난다. 결국 LG는 '선발투수 봉중근'을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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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봉중근의 스타일은 마무리에 최적화돼 있다. WBC에서 이치로에게 굴욕을 안길 정도로 주자 견제 능력은 그를 따라 올 만한 이가 없다. 타이트한 상황에서 등판하는 마무리투수에게 견제 능력은 신이 내린 축복과도 같다. 퀵모션 역시 빠르다.
게다가 봉중근은 수비력이 뛰어나다. 아홉번째 야수 역할을 훌륭히 해내는 덕에 번트 등 상대 작전에 대한 대처 능력도 좋다. 여러모로 타이트한 상황에 등판하는 마무리투수로서 훌륭한 자질을 갖췄다.
이런 훌륭함에도 봉중근에 대해선 '마무리로 검증되지 않았다'는 선입견이 크게 작용했다. 몸이 늦게 풀리는 특성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일방적인 경기라면 정상적으로 대기할 수 있지만, 경기 막판 갑작스레 상황이 요동칠 때 마무리투수는 갑자기 등판을 준비해야 할 때가 많다. 이런 특성상 워밍업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큰 걸림돌일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봉중근은 1회 투구수가 많았다. 긴 이닝을 던지는 선발투수 중에선 첫 회 고전하는 이들이 많다. 마운드에 올라서도 감을 잡는 데 한참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봉중근 역시 그런 슬로스타터 기질이 있었다. 짧은 이닝을 던져야 하는 마무리투수에겐 가장 큰 결격 사유였다.
하지만 봉중근은 이 모든 우려를 비웃듯 마무리 전업에 성공했다. 봉중근의 마무리 전업을 주도한 차명석 투수코치는 "그동안 해보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 확실한 선발투수를 마무리로 돌리는 건 투수코치의 목을 내놓는 일과도 같다. 실패했을 때 타격이 크다. 코칭스태프 입장에서 쉽게 시도하기 힘든게 사실"이라고 밝혔다.
전임 투수코치들의 고민이 실행 직전 좌절된 이유다. 차 코치는 "나이도 들어가고 있고 지금 봉중근 몸으로는 길게 던질 수 없다. 선발로 하루 던진 뒤 며칠 쉬는 게 낫지 않냐는 말도 있지만, 마무리로 60이닝 이하로 끊어주는 게 이상적이라고 판단했다"고 덧붙였다.
봉중근은 지난 겨울부터 김용일 트레이닝코치의 지도 아래 철저하게 빠른 워밍업을 준비했다. 사실 워밍업 문제는 노력하면 되는 것이었다. 1회 고전하는 데 대해서 차 코치는 "변화에 적응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겨울부터 착실히 준비했고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 선수다.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이제 봉중근 본인도 마무리를 원한다. 보직의 재미를 느꼈고, 팔꿈치 인대접합 수술을 받은 선배 임창용의 '롱런하라'는 조언도 한 몫 했다. 어느덧 30대 중반을 바라보는 그에게 마무리는 확실히 롱런할 수 있는 기회다. LG 역시 마무리 잔혹사를 끊고 홀가분하게 내년 시즌을 준비할 수 있게 됐다.
이명노 기자 nirvana@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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