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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가 끝나고 며칠 지나지 않아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현재 한 고등학교에서 선수로 뛰고 있는 선수의 학부모였다. 아직 2학년이라 소속 학교를 밝히는 것은 힘들다고 했다. 그는 고교야구의 현실에 대해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아마야구의 수준이 떨어졌다는 지적에 대한 학부모의 입장을 조목조목 말했다. 속에 담긴 울분도 한껏 토해냈다.
무언가 잘못 됐다. 신인(新人)은 새로 등장한 사람을 의미한다. 새 등장에 대해 1군 무대로 기준을 크게 잡다 보니 '중고' 신인왕들이 탄생하고 있지만, 순수 신인들이 후보 축에도 못 낀다는 사실은 아마야구도 반성해야 하는 부분이다.
물론 프로의 벽이 그만큼 높아졌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마야구는 그동안 '제살 갉아먹기'에 빠져있었다. 문제점을 알고 있음에도 누구 하나 섣불리 손을 대지 못했다. 대세에 역행하면 최우선 과제인 '성적'을 낼 수 없었다. 결국 모두가 '독'이 들었음을 인지하고서도 그 잔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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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문제가 있다. 스포츠조선은 제25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결승 진출이 좌절된 뒤 8일자 <고교야구 '홈런치는 법' 잊었다>를 통해 아마야구의 현실에 대해 진단했다. '국제 경쟁력 강화'와 '시대의 흐름'이라는 미명 아래 성급하게 도입한 나무배트가 불러온 일종의 '나비효과'를 소개했다.
장타가 실종되면서 자연스레 점수를 짜내는 '스몰볼'의 트렌드가 형성됐고, 기본기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이기는 야구'만 지향한 것이 질적 수준 저하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 고교야구 현장에서는 '어설프게 프로 흉내만 내는 선수들이 많다', '겉멋부터 들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선수를 직접 선발하는 스카우트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다.
익명을 요구한 이 학부모는 여기에 더해 현장에 만연한 '야수 회피 현상'을 소개했다. 신체조건이 조금만 좋아도, 그리고 가능성이 조금만 보여도 야수 대신 투수를 하려 한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선택의 주체'가 선수 본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과거에 비해 감독이 원해서, 또는 부모가 원해서 하는 경우가 늘었다는 것이다.
지도자가 원해서 하는 경우는 당연히 '성적'을 위해서다. 물론 '투수는 소모품'이라는 구시대적인 발상도 깔려 있다. 어린 시절부터 닳을 대로 닳아버린 선수들보다 '새 얼굴'을 선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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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수 년 전부터 몇몇 신인에 대해 "투수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어깨가 싱싱해 지명했다"는 식의 스카우팅 리포트가 작성되는 일이 많아졌다. 아마야구에서 포지션을 옮기는 일이 많다곤 하지만, 어느 정도 자기 포지션을 정립해야 할 고등학교에서 졸업을 1년 앞두고 자리를 옮기는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2학년, 심지어는 3학년이 되서 투수로 전향하는 선수들도 있다. 좋은 신체조건에 싱싱한 어깨. 조건만 괜찮다면 일단 '빠른 공'을 던질 수는 있다. 고교야구에선 제구가 어느 정도 부족해도 괜찮은 직구 하나만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러한 '검증되지 않은' 잠재력만 보고 지명한 경우 프로에서 실패할 확률은 높아진다. 2006년 2차 1라운드 전체 3순위로 LG가 지명한 신창호는 2학년까지 포수를 해 어깨가 싱싱하다는 이유로 지명됐다. 류현진 바로 뒤에 이름이 불릴 정도로 상위라운더였지만, 2경기서 4⅓이닝 5실점이라는 초라한 성적 만을 남기고 방출됐다. 신창호는 일본 독립리그를 거쳐 올시즌 KIA에 신고선수로 입단했다.
2011 신인드래프트서 1라운드 전체 7순위로 지명된 서진용도 같은 이유로 1라운드 지명자가 됐다. 2학년 여름까지 그의 포지션은 3루. 프로 지명을 예상치 못해 신인지명회의 현장에 참석하지 못할 정도로 촌극을 빚었다. 서진용은 입단 직후 무릎 수술을 받고 재활로 1년을 보냈다. 계약금은 받았지만, 신고선수 신분으로 아직까지 1군 기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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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준비되지 않은 투수의 성공 가능성이 얼마나 낮은 지 보여주는 일부 사례다. 이 학부모 역시 고민에 휩싸였다고 했다. 주전 라인업에 들기 시작한 2학년 때 고민은 극대화됐다. 신체조건이 좋아 유혹도 컸다. 미래가 달려있기에 10년 가까이 뒷바라지 해온 부모의 생각도 분명 중요했다.
그는 학부모의 입장에서 아들에게 '투수 전향'을 권고하는 슬픈 현실을 털어놓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10년 가까이 뒷바라지를 하는 데 드는 돈은 평균 2억원 정도. 하지만 야수로 상위라운드 지명을 받는 건 '하늘의 별따기'와도 같다.
구단 사정상 좋은 야수를 빨리 선택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대개는 투수를 모으는 데 주력한다. '야구는 투수 놀음'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투수는 많을 수록 좋다는 게 모든 구단의 공통된 생각이다.
부모들은 '들인 돈'을 생각하면, 이왕이면 투수를 시켜 '거액의 계약금'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으려 한다. 불확실한 희망에 거는 무모한 선택이지만, 부모 입장에선 어쩔 수 없다는 게 이들의 항변이다. 이 학부모는 "요즘 고교 야수들 중에 키가 1m80이 넘는 선수들이 있나. 고작 1m70 정도"라며 개탄했다.
전화를 건 학부모의 선택이 궁금했다. 한숨을 내쉬며 그가 대답했다. "부모 생각만 할 순 없잖아요. 저흰 그냥 아들이 좋아하는 것, 잘 할 수 있는 것 시켰습니다."
이명노 기자 nirvana@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