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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치면, 나도 친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고수끼리는 통하는 것일까. 마치 상대방의 페이스를 보고 따라붙거나 한발 도망가는 형국이다. 올 시즌 넥센 강정호(18개)와 삼성 이승엽(14개)의 홈런 레이스가 점차 가속도를 붙이고 있다. 아직 4개 차이로 강정호가 다소 여유있게 앞서 있지만, '몰아치기의 달인' 이승엽이 피치를 올리면 4개 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강정호의 홈런 신고식, 이승엽을 도발하다
'추격자' 이승엽이 홈런을 쳐서 한 발 따라 붙으면 같은 날 잠시 후 강정호가 달아나는 홈런을 치는 패턴은 지난 14일까지 총 4차례 나왔다. 이 네 번의 경기에서 이승엽은 4개(29%), 강정호가 6개(33%)의 홈런을 쳤는데, 전체 홈런대비 적은 비율은 아니다. 서로간의 경쟁이 홈런 페이스를 더 한층 끌어올렸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지난 4월 15일. 이승엽이 대구 넥센전에서 시즌 첫 홈런을 친 날이다. 당시 강정호는 이날 3회초와 5회초 각각 차우찬과 권오준을 상대로 시즌 3, 4호 홈런을 연거푸 친 상황이었다. 까마득한 후배의 홈런 도발은 '아시아 홈런왕' 이승엽의 투지를 한껏 자극했다. 이승엽은 곧바로 6회말 넥센 오재영을 상대로 투런 홈런을 날리며 포효했다. 마치 '강정호, 내가 누군지 보여주마!'라고 외치는 듯한 홈런이었다.
두 번째 같은 날 홈런은 4월 27일이었다. 이번에는 이승엽이 먼저 폭발했다. 이승엽은 인천 SK전에서 3회초 선두타자로 나와 상대 투수 로페즈로부터 시즌 5호 솔로홈런을 날렸다. 전날에 이은 이틀 연속 홈런.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강정호가 침묵을 깨고 홈런포를 터트렸다. 4월 15일 삼성전에서 시즌 4호 홈런을 터트린 뒤 열흘이 넘도록 홈런을 치지 못했던 강정호는 이날 청주 한화전에서 5회초 1사 1루 때 상대투수 송창식으로부터 좌중월 투런 홈런을 날린다. 12일 만에 터진 시즌 5호 홈런. 이 홈런으로 강정호는 이승엽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이날 이승엽이 5호 홈런은 오후 7시 18분, 그리고 강정호의 5호 홈런은 8시 10분에 각각 터졌다. 채 한 시간의 간격도 안되는 시간. 마치 강정호가 이승엽이 홈런을 쳤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타석에서 한층 더 힘과 집중력을 높여 홈런을 만들어낸 느낌이다.
홈런 라이벌의 전쟁, 보는 이는 흥분된다.
첫 두 차례의 같은 날 홈런은 어떤 면에서는 '강정호의 신고식'과도 같았다. 시즌 초반 이승엽은 강정호의 존재감에 대해 큰 인식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던 것이 이승엽이 국내 무대에서 한창 활약할 때 강정호는 고교생이었고, 또 강정호가 프로에 입문한 뒤에도 '홈런'에 대해서는 특별한 재능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정호가 4월 15일 '아시아 홈런왕' 이승엽의 눈앞에서 연타석 홈런을 치며 무력 시위를 한 셈이다. 이후 4월 하순까지는 이승엽과 페이스를 맞추며 홈런 감각을 끌어올렸다. 4월 27일 시즌 5호 홈런을 친 강정호는 이후 29일까지 사흘간 연속으로 아치를 그리며 단숨에 이승엽을 추월해버렸다. 그러더니 5월에 7개의 홈런을 몰아치면서 이승엽과의 격차를 벌려놨다. 마치 이승엽에게 '선배님, 이제는 제 시대입니다'라고 웅변하는 듯한 폭발력이었다.
이후 6월 들어 두 차례 더 같은 날 홈런이 나왔다. 지난 6일, 강정호는 목동 LG전에서 6회 1사 1루 때 투런 홈런을 쳤다. 오후 7시 5분에 터진 시즌 15호 홈런. 그러자 멀리 광주에서 KIA와 경기를 하던 이승엽은 34분 뒤, 8회 KIA 홍성민에게 2점 홈런을 뽑아냈다. 다시 격차는 3개로 좁혀진 상황. 하지만 강정호가 이승엽의 추격을 물리치고 도망가는 데는 딱 14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오후 7시53분, 이승엽이 시즌 12호 홈런을 친 지 딱 14분 뒤에 강정호는 16호 홈런을 쳤다. 14일도 '이승엽의 추격→강정호의 도주'의 같은 패턴이었다. 이승엽이 대구 한화전에서 4회말 솔로홈런을 치자 강정호는 목동 KIA전에서 7회말 2점포를 날렸다. 3개로 좁혀졌던 격차는 다시 4개로 벌어졌다.
아직 시즌 중반이 채 되지 않았음에도 숨이 막힐 듯 긴박감이 느껴지는 레이스다. 선수들끼리는 사실 별로 의식하지 않을 수도 있고, 더군다나 경기 중에 상대의 홈런 상황을 파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하다. 하지만 이런 경쟁 구도의 형성은 서로간의 페이스를 동시에 끌어올릴 수 있는 긍정적 효과가 있다. 과거 2003년 여름, 이승엽과 심정수(당시 현대)의 뜨거웠던 홈런 레이스를 떠올리면 비슷할 것이다. 하루가 지나면 순위가 뒤바뀌거나 격차를 벌리던 그 긴박한 레이스는 결국 두 선수 모두에게 이익이었다. 더불어 이를 지켜보는 팬들도 엄청난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남은 시즌 홈런왕 구도가 어떤 식으로 전개될 지는 아직 예측 불허다. 또 다른 도전자가 부각될 수 도 있다. 그러나 강정호-이승엽의 신구 거포간 쫓고 쫓기는 대결구도는 분명 올해 프로야구의 또 다른 흥미거리임에는 틀림없다.
이원만 기자 wma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