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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나온다고? 그럼 무조건 보러가야지."
한국이 IMF의 구제금융을 받아 휘청이던 90년대 후반, 당시 LA 다저스 소속의 박찬호는 지친 국민들에게 '희망의 아이콘'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박찬호가 선발 등판하는 날이면 사람들의 시선은 온통 TV에 쏠렸다. 어쩌면 이 때가 박찬호의 존재감이 가장 컸던 시기였을 것이다. 당시 박찬호의 선발 등판일과 등판시각은 야구팬의 최대 관심사였고, 그 일정에 맞춰 사람들은 행동의 우선순위를 정했다. '박찬호 파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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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낮 12시 경 청주 시내 한 음식점 앞.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몰려든 시민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뤄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화제의 대부분은 '야구' 이야기였다. "어제 한화 경기 봤어? 참 아슬아슬하게 이기대". " 맞어, 바티스타 그 녀석 참 사람 속타게 하더만" 대전구장의 보수공사 때문에 한화가 4월 한 달간 청주에서 홈경기를 치러서인지 청주의 야구 인기는 예상 이상으로 뜨거웠다.
전날 경기결과에 대해 짧은 소감을 주고받은 시민들은 이내 오늘 경기에 초점을 맞췄다. 지난 12일 박찬호가 청주에서 첫 승을 거둔 뒤라서인지 이날 선발 등판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오늘은 얼마나 잘 던지려나. 이따 보러가자고" 만원사례를 예감케 하는 말들이 쏟아졌다.
아니나다를까. 이날 청주구장은 경기시작 1시간27분 전인 오후 5시3분에 7500석이 모두 팔렸다. 이미 인터넷 등을 통한 사전 예매를 통해 6700석이 팔린 상황에 현장 판매분으로 배정된 티켓은 800장. 티켓 판매소 앞에 길게 늘어선 팬들에게 800장은 턱없이 부족해보였다. 역시 준비된 티켓은 오후 4시30분에 판매가 시작된 후 불과 33분만에 동이 나버렸다.
평일이던 전날 경기에서는 불과 4787명이 입장했던 청주구장이다. 그러나 이날 만큼은 가볍게 올 시즌 세 번째 만원사례를 달성했다. 눈에 띄는 점은 세 차례의 매진 가운데 개막전(11일 두산전)을 빼고는 모두 박찬호가 등판할 때만 매진됐다는 것이다. 박찬호의 엄청난 '티켓 파워'를 알 수 있다.
표가 동이나자 마치 포스트시즌에나 볼 수 있는 풍경이 속출했다. 티켓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지인들을 동원해 '티켓확보'에 나섰고, 한화 구단직원들은 경기 시작 이후에도 "입장 좀 시켜달라"는 청탁전화에 시달렸다. 한화가 박찬호의 영입을 통해 기대한 것은 바로 이런 효과다.
14분의 팬서비스,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원정팀 LG가 한창 연습을 하던 오후 5시18분. 경기 시작을 1시간12분 남겨둔 이 때 1루측 관중석으로부터 '와아~'하는 함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박찬호가 몸을 풀기 위해 덕아웃에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함성의 파문은 마치 물컵에 떨어진 잉크 한 방울처럼 빠르게 퍼져 나갔다.
자기관리에 대해서만큼은 메이저리그에서도 최고로 통한 박찬호였다. 그는 정확하고 철저한 남자다. 지난 12일 두산전을 앞두고서도 정확히 오후 5시18분에 덕아웃에서 천천히 걸어나와 외야에서 스트레칭을 했던 박찬호는 이날도 역시 같은 시간에 정확하게 맞춰 나왔다.
덕아웃에서 외야쪽으로 걸어가며 환호성을 보내는 팬을 향해 손을 흔들어준 박찬호는 우측 외야쪽에서 스트레칭을 했다. 그 역시 자신만의 프로그램에 따라 정확한 순서와 갯수 그리고 강도를 맞춰나갔다. 딱 14분이 걸렸다. 박찬호는 오후 5시32분에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이 역시 지난번과 마찬가지다.
선발 등판을 앞두고 스스로를 위한 시간이었지만, 이 '14분'은 청주구장에 들어선 관중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팬서비스나 같았다. 팬들은 휴대전화나 디지털카메라로 박찬호의 모습을 열심히 찍었다. 그리고 아낌없는 응원의 함성을 내질렀다. 이것만으로도 경기장 분위기는 충분히 뜨거워져있었다.
청주=이원만 기자 wman@sport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