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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의 국내야구 공백. 과연 이승엽은 어떤 모습을 보이게 될까.
22일 목동구장 취재기자실에 앉아 넥센과 삼성의 경기를 지켜보다 문득 오른쪽 눈가에 낯선 실루엣이 들어왔다. 창밖을 보니 한 타자가 대기타석에서 '빈 스윙'을 하고 있었다. 국내 타자들 가운데 기억에 잘 없던 스윙폼과 체격이다.
대기타석의 타자는 삼성 이승엽이다. 시범경기 들어 이승엽을 현장에서 보는 건 처음이다. 파란색 유니폼을 다시 입고 투수쪽을 쳐다보며 연습스윙을 하는 이승엽의 모습은 예전과 똑같았다. 타자로서 정말 좋은 체격, 요즘 흔한 말로 하면 우월한 상하체 비율, 타이밍에 맞춰 이뤄지는 스윙도 옛날과 다르지 않았다.
물론 이승엽이 일본에서 뛰던 8시즌 동안 해외출장을 통해 그의 타격을 지켜본 적도 여러 차례 있다. 하지만 도쿄돔 본부석 상단에 있는 기자석에서 바라봤던 이승엽은 왠지 낯설었다. 목동구장에서 이승엽을 다시 보게 되니 '아, 국민타자가 다시 돌아온 게 맞긴 맞구나' 하는 느낌이다.
어느새 최고참급 된 이승엽
지난 2000년부터 3시즌 동안 삼성 담당을 맡았었다. 이승엽은 2003시즌에 56홈런을 친 뒤 일본으로 건너갔다.
2001시즌을 마친 뒤였던 걸로 기억난다. 당시 삼성에서 새 주장을 뽑아야하는데 "선수협 문제도 있고 하니 구단과의 대화에서 파급력이 있으려면 이승엽이 주장을 맡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 실제 그런 움직임으로 이어질 뻔도 했지만 무산됐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직 주장을 맡기엔 어리다"는 의견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승엽의 나이는 만 25세. 이미 '국민타자' 칭호를 듣는 그였지만 팀내 서열에선 '중참'에 겨우 낄까말까 한 정도였던 셈이다.
9년만에 국내 야구장에서 다시 보게 된 이승엽은 어느새 팀내 최고참급이 돼있다. 단순히 서열만 빠른 고참이 아니다. 구단 관계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승엽은 외국인선수들을 불러 밥을 사주며 용병 생활의 어려움을 얘기하고, 김상수 강명구 등 후배들도 많이 챙긴다 한다. 무엇보다도 매사 진정성을 갖고 임하는 모습이 후배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고 한다.
한때 두산을 원했던 이승엽
2002년에 삼성이 한국시리즈 첫우승을 차지한 뒤 이승엽은 전화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해외 무대에 나갔다 돌아오면 서울 팀에서 뛰고 싶습니다. 그때쯤 되면 아이도 많이 자랄텐데 교육문제 같은 걸 생각하면 서울 팀에서 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친한 선수들이 많은 두산이 마음에 든다고 했었다.
하지만 해외무대에서 힘겹게 뛰면서 역시 '친정팀'에 대한 그리움이 짙어졌을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이승엽은 "선수생활의 마지막은 삼성에서 하고 싶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해 일본생활을 마무리하며 삼성과 계약, 친정팀으로 복귀했다.
야구 환경만 놓고보면 일본에서 뛸 때가 훨씬 좋았을 것이다. 깔끔한 구장 시설과 라커룸. 철저하게 훈련에 집중할 수 있도록 마련된 동선 등. 국내 구장은 대부분 '어수선'한 환경인 게 현실이다. 하지만 이날 목동구장에서 훈련중인 이승엽을 살펴보니 얼굴에서 엷은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최근 몇년간 일본의 야구장에선 이런 모습을 보기 어려웠다. 본격적으로 시범경기를 치르면서, 이승엽은 '아! 이제 정말 돌아왔구나' 하는 느낌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이승엽은 이날 넥센전에서 6회에 중전안타로 출루한 뒤 왼손투수 오재영을 상대로 2루 도루에 성공하는 파격적인 모습까지 보여줬다. 공식경기에서 이승엽의 도루가 나온 건 2003년 10월4일 대구구장에서 열린 SK와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이 마지막이었다. 정규시즌 기준으로는 2003년 8월2일 대구 현대전이 가장 최근이었다. 이승엽과 도루라…, 마음이 한결 편해졌기에 시범경기 자체를 즐기는 것이라 여겨진다.
물론, 이승엽도 성적을 내야 살아남는다
문제는 올해 성적이다. 이승엽도 좋은 성적을 내야한다는 부담을 안고 있다는 게 구단 관계자들의 설명. 2003년에 56홈런을 쳤던 타자다. 그의 한타석 한타석에 얼마나 많은 시선이 모아질 지는 따로 얘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두달 전만 해도 약간 비관적인 소식이 들려왔었다. 전훈캠프에 참가중인 이승엽이 타격폼이 무너져있어 이를 고치는 게 꽤 어려울 수 있다는 얘기였다. 한달 전에는 좀처럼 타구 비거리가 늘지 않아 고민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하지만 점점 나아지고 있다. 삼성 김한수 타격코치는 이날 "승엽이가 아주 조금씩 천천히 페이스가 올라가고 있다. 캠프때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다. 정규시즌 개막때에 맞추겠다는 본인 얘기대로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승엽이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면 삼성은 선수운용에 있어 다소 머리아픈 상황에 놓일 수 있다. 그걸 누구보다 잘 느끼고 있을 이승엽이다. '진정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를 모토로 삼아온 그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이제 곧 '이승엽 타임'이 시작되기를 기대해본다.
목동=김남형 기자 star@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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